[인터뷰] ‘금융허브’ 싱가포르에 없는 두 가지… ‘정년과 관치’

입력 2023-02-27 12:15 수정 2023-02-27 14:24
권기정 NH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이 지난 21일 싱가포르 법인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싱가포르는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번창하는 금융 허브 도시로 평가받는다. NH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NH Absolute Return Partners)의 권기정 법인장은 싱가포르의 성장비결로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 자유경쟁 체제와 유연한 노동제도를 꼽았다. 사법체계와 금융당국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신뢰도 선진 금융시장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싱가포르에 비해 한국은 아직도 규제 문턱이 높다는 평이 크다.
“대표적으로 폐쇄적인 외환시장만 봐도 외국인들은 한국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한국의 경우 연간 5만달러 이상을 국외로 송금하려면 번거로운 신고 절차가 따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이런 규제가 없다. 글로벌 투자금이 전부 달러화로 움직이는데 달러에 대해 이렇게 강도 높은 규제를 유지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선뜻 한국 자본시장에 돈을 넣으려는 의지를 갖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정서나 여론상 과감한 규제 철폐를 외치기 어렵다.
“아마 외환위기(IMF 사태) 당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외환보유고 등 대외 경제 사정에 민감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정치인들도 이런 국민적 트라우마를 알고 있기에 선뜻 규제를 없애자고 제안하지 못한다. 하지만 1997년과 비교해 우리나라 경제력과 국력이 상당히 올라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 수준의 규제를 유지하면 리스크는 그만큼 덜어지겠지만 혁신도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직접적인 금융규제 외 노동시장에 대해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만이 많다는데.
“한국의 경색된 고용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대부분이다. 싱가포르에는 정년이라는 개념이 없다. 정규직으로 채용되더라도 매년 성과에 따라 연봉 협상을 하고 재계약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유능한 인재를 붙잡고 싶어서 보수를 올려주고, 직원은 몸값을 높이기 위해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성과가 저조하고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해고할 수 없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경색된 고용제도도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한 결과겠지만, 외국인 입장에서는 자기 사업체에 대한 인사권을 제한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금융권 조직 내 수직적인 문화가 없다고 들었다.
“싱가포르는 서양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다 보니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를 때 직급을 붙여서 딱딱하게 부르는 ‘호칭 문화’가 없다. 회장(President) 정도의 직급자가 아닌 이상 최상급자와 최하급자가 편하게 이름을 부르며 업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회사의 경우에도 일반 운용역 직원이 나를 ‘Ki-Jung(기정)’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나도 그를 이름으로 부른다. 또 주세(酒稅)가 워낙 비싸다 보니 한국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며 영업하는 강압적인 문화도 거의 없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렇게 자유를 중시하는 분위기도 싱가포르가 글로벌 금융 허브로 거듭나는데 도움이 됐다고 본다.”

-한국은 외국인이 국가 핵심자본을 소유하는 것에 민감하다. 싱가포르는 어떤가.
“싱가포르의 인구의 최소 3분의 1 이상이 외국인이다. 싱가포르는 로컬 국적자가 적은 대신 유능한 외국인 인력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우수한 인재들이 싱가포르로 와서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것, 한국인의 것이라는 정서도 좋지만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우수한 외국인 인재도 더 이상 배척해서는 안 된다. 특히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정서를 이겨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호이밍 입(Hoi Meng Yip) NH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 수석 투자운용역이 지난 21일 싱가포르 법인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권 법인장과 함께 동석한 이 회사의 수석 투자운용역 호이밍 입(Hoi Meng Yip)씨는 싱가포르가 금융허브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로 정부 당국에 대한 높은 국민적 신뢰와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했다.

-한국은 사법부와 금융당국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심하다. 싱가포르는 어떤가.
“체감상 10명 중 9명 이상이 ‘죄를 지으면 공평하게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만큼 솜방망이식 처벌이 아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부에 대해서도 기업들을 지휘하며 관치에 나서기보다는 중간에서 시장참여자들을 도우며 프리미엄을 얻어가는 중재자적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그렇다 보니 개인 투자자들 입장에서 정부나 사법부를 불신할 이유가 없다.”

-금융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하다는 뜻인가.
“싱가포르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절대적인 처벌 건수가 적은 면도 있고 처벌이 강해 범죄 의지가 생기지 않는 면도 있다. 특히 자금세탁 같은 범죄의 경우 적발 즉시 기업에는 거래정지 처분이 내려지고 사업주는 싱가포르에서 다시는 사업을 하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한다. 범죄 규모가 크면 사업은커녕 싱가포르에서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할 것이란 각오마저 해야 할 정도로 법이 엄정하다.”

-한국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공매도가 ‘개미의 주적’으로 불린다.
“싱가포르 같은 금융 선진국의 경우 공매도가 본래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다. 펀드 운용에 대한 헤지(위험분산) 목적이 대표적이다. 완전한 자유경쟁 체제이다 보니 시장 흐름과 반대로 공매도를 실행하게 되면 되레 공매도 실행자가 손해를 입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 반면 한국은 폐쇄적인 금융시장을 갖고 있다. 아직도 공매도를 실행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주가를 억지로 끌어내려 시세 차익을 얻으려는 행위가 적지 않게 적발된다. 게다가 적발이 된다 해도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힘없는 개인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리 만무하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