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진령군, 라스푸틴, 그리고 천공

입력 2023-02-26 19:34

‘진령군’은 조선 말기 고종이 한 무녀에게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으로 내린 작호이다. 우연히 민비와 연이 닿은 진령군이 점을 쳐 주었는데, 그 점이 우연히 맞아서 민비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궁중의 무녀가 된 진령군은 왕실을 위해 산천기도, 굿, 제사를 맡았고, 고종과 민비는 국가 중대사를 진령군과 의논했다.

실세가 된 진령군은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기를 마음대로 하였고 매관매직까지 일삼을 정도로 횡포가 심했다. 일례로 허약한 세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금강산 1만2000 봉마다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쳤다고 한다. 또 스스로 관우의 딸이라고 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떼돈을 벌었는데, 고종과 민비도 여기에 자주 찾아와서 점도 치고 굿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친일 내각이 진령군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모든 재산을 몰수한 뒤 풀어주었다. 게다가 강력한 후원자였던 민비가 시해되는 일까지 발생하자 진령군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언제,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진령군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한 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진령군과 거의 동시대를 산 러시아 제국 요승으로 ‘라스푸틴’이 있다. 문맹에, 술꾼이자 난봉꾼이었던 라스푸틴은 수도승을 자처하며 사이비 종교적 활동으로 지방 귀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 어느 귀족 부인의 주선으로 니콜라이 2세 부부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황후가 그를 ‘신의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오랫동안 혈우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황태자의 치료를 맡겼는데, 소 뒷걸음질에 쥐 잡는 식으로 증상이 호전되었다. 이후 라스푸틴은 황제 부부의 절대적 신임 속에 종교와 외교, 내정까지 간섭하며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어 온갖 횡포를 일삼았다. 매점매석은 물론 능력과 관계없이 그에게 아첨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수상과 장관을 임명하고 파면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사람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니 제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라스푸틴의 조언대로 전쟁을 수행했으나 독일군에 연전연패했고, 막대한 전비 때문에 국가재정이 파탄나서 나라의 존립 자체도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결국, 라스푸틴은 반 라스푸틴 황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몇 달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모든 황제 일가도 볼셰비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러시아 제국의 종말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가 라스푸틴이라 할 수 있겠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에게 지난 3월 육군참모총장 공관과 서울사무소에 ‘천공’이 다녀갔다는 증언을 들었다. 김용현 처장이 천공을 대동해 육참총장 공관을 미리 둘러봤고, 이후 대통령 관저가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한남동 외교부장관 공관으로 바뀌었다.”

군사 및 국방 전문가인 김종대 전 의원이 무속인 천공이 대통령 관저 이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한 말이다. 천공은 ‘수행이 3년 7개월째가 되면서 밤에는 차원계를 왕래하며 신들과 대화하고 천지 대자연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수행이 시작된 지 12년째가 되었을 때 봄에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3년 차가 되면서 쓰레기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때부터 비로소 세상이 보이기 시작을 하였고, 낮에는 쓰레기를 줍고 밤에는 약 15분 정도 잠을 자고 차원계를 왕래하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주장하는 무속인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합리적 의심이 아닌 객관적 근거 없이 무속 프레임을 씌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가짜뉴스로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며 김 전 의원을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부디 대통령실의 해명이 사실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왜일까.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