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유태인 철학자 훗설(E. Husserl: 1859~1938)도 지식추구의 사유 방식이 개인적 판단중지(에포케)라고 주장한다. 곧 신적섭리의 괄호 안에 나의 주장과 신념을 섣불리 내세우는 것을 삼가는 태도다. 실체와 허상이 뒤섞여 경계가 모호한 것이 삶 아닌가?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 되신 하나님께 늘 질문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유다.
17세기 이탈리아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작품이 있다. 그림의 배경이 다소 어둡다. 화면 한복판엔 네 사람의 등장인물이 한 덩어리인 양 모여 있다. 주님은 왼편에서 그의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창날의 상처가 있는 옆구리를 드러내 보이신다.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은 오른편에서 그 분의 가로로 벌어진 상처를 확인하려는 듯 모두 머리와 허리를 굽힌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근데 주님은 도마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깊은 상처의 절개부위를 만져보도록 이끈다. 그 분의 손 등엔 못 자국이 선명하다. 도마가 검지 손가락으로 주님의 상흔을 헤집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불안정한 시선으로 그것을 더듬고 있다.
요한복음에선 도마의 성격에 대해 네 번 언급했는데 (그가) 맨 처음 등장한 곳은 제11장이다. 도마는 주님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인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했으나 (주님이) 그 손에서 벗어나 요단강 저편으로 피하셨다고 기록한다.(제10장 후반부) 거기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나사로의 여동생들이 오빠가 병들어 앓고 있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주님은 다시 유대지방 베다니에 가시고자 했다. 이에 제자들은 그 곳 유대인들이 방금도 주님을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느냐고 애써 만류했다.
하지만 주님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도마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고 말했다. 도마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있었다.
두 번째 도마가 우리 관심을 끄는 것은 제14장이다.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집으로 가서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말씀하셨다. 그 후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고 덧붙였다. 그러자 도마가 슬픈 표정으로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라고 물었다.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마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솔직한 감정표현과 함께 깨달음에 대한 자유롭고 개방적 사고를 가진 자였다.
세 번째 도마가 등장하는 대목이 제20장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바로 그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보았다고 (그들에게) 증언했다. 동료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도마에게 전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믿음은 의혹의 짙은 안개 속을 지나면서 시나브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도마는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주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들은 적도 있었으나 실지, 그 분이 부활하신 사건은 인정할 수 없었다. 도마는 “내가 그의 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완고히 선언했다.(20:25) 그는 아마도 실증적 영혼의 소유자인 것 같다. 때론 많은 시련이 하늘의 메시지를 듣게 하듯 정직한 의심은 소명의 불꽃을 피우게끔 하지 않은가? 주님은 그의 의심을 긍휼히 여기셨다.
마지막으로 제20장 종결부에선 특히 번민의 늪에 빠진 도마를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두 번째 방문이 묘사된다. 팔 일이 지난 후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는데 주님이 홀연히 찾아오셨다. 평강을 축복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말씀하셨다.
주님은 의심하는 제자를 질책하시기보다 오히려 당신의 피 흘리시며 찢기신 몸의 큰 상처를 기꺼이 보여주신다. 이제 도마에겐 ‘그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고 ‘그 옆구리’에 그의 손을 넣어보는 것이 필요치 않다. 그의 눈에 드리운 의심의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도마는 분명하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고백하면서 그 분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뿐만 아니라 의미심장한 이 진술은 복음서에서 그가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한 뜻깊은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맺음말: 믿음이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영안으로 분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표적을 간구한 도마의 약점은 ‘봄’을 통해 ‘복음’을 믿게 됐다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20:29) 말씀하신다. 그것은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일컫는다. 마치 이스라엘 대제사장 아론이 속죄 날 지성소에 들어가 직무를 행할 때 옷에 달린 금방울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듯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한 기쁨과 사랑으로 채워지길 갈망하는 바는 곧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증표 아닌가?
이정미 객원기자 jong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