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낮 12시30분.
“영화 몇 시에 시작해요?”
“12시에 시작했어요.”
매표소 직원의 대답에 노인은 “아이고 늦었네” 하면서도 느긋하게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 직원 역시 재촉하지 않고 “이따 똑같은 영화 또 하니까 공짜로 이어 보세요”라고 답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바깥 공기와 다르게 노인의 여유를 닮아있는 이 극장, 어떤 곳일까.
이곳은 1957년 개관 후 잠깐의 공백기를 가졌다가 10년 전 다시 인천 주민 곁으로 돌아온 ‘미림극장’이다. 이런 풍경은 노인들의 놀이터인 미림극장이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노년층뿐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공간을 꿈꾸는 인천광역시 동구의 미림극장을 찾았다.
“늦게 와도 다음 회차 보면 되는 곳, 미림극장”
오전 9시 20분. 극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극장 근처를 배회하는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남성이 이번 주 ‘상영 예정 프로’ 게시판 앞에 멈춰 유심히 포스터를 살폈다. 이날은 ‘황색 하늘(1948)’ 3회, ‘미녀와 야수: 마법에 걸린 왕자(2023)’, ‘졸업(1967)’,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2023)’이 상영 예정이다.
극장 앞을 서성이던 김상철(69)씨가 “오늘도 한국영화는 없나”라고 물었다. 곧 상영될 영화는 ‘황색 하늘(1948)’이라는 미국의 서부영화. 요즘은 외국 영화만 상영된다며 툴툴대던 김씨는 “1970년대부터 미림극장에 왔다”며 “원래는 관객이 더 많았는데 요새는 많이 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9시 30분쯤 극장 문이 열리고 노인 서너 명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함께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매점 겸 매표소’. 극장 내 딱 1개 있는 상영관 옆에 자리 잡은 매점은 옛날 주전부리를 팔고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남성은 구식 팝콘 기계가 옥수수를 튀기기 시작하자 매표소 사장에게 자연스럽게 팝콘을 주문했다.
10시가 가까워지자 2~3명의 노인이 다시 연이어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1층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영화 상영을 기다렸다. 일반 영화는 노년층 ‘3000원’, 일반 관객 ‘6000원’에 판매 중이다. 독립·예술영화 관람은 노년층 ‘6000원’, 일반 관객 ‘8000원’이다.
상영관 내 좌석 수는 1층 206석, 2층 47석으로 총 253석이었다. 10시가 되자 대기 의자에 앉아있던 이들이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상영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표소를 담당하는 여성 직원 안정복(63)씨는 “오늘 10시 상영 관객은 10명 미만”이라며 “들쭉날쭉하긴 해도 평소엔 오늘보다 더 많다”고 했다. 안씨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70대로 보이는 남성이 극장 문을 슬쩍 열고는 “영화 재밌어요”라고 물었다. 안씨는 “당연히 재밌죠”라고 대꾸해줬다.
안씨는 같은 영화를 수차례 반복 상영하기 때문에 “중간에 들어오시면 다음 회차를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매번 영화표를 끊고 지불해야 하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슬쩍 저으며 “한번 돈 내고 입장하면 끝이에요. 계속 봐도 됩니다”고 웃으며 말했다.
“경로당과 ‘비교 불가’…미림극장은 노인들 놀이터”
온종일 미림극장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드문드문하긴 해도 멎지 않고 이어졌다. 손님은 대부분 느린 발걸음의 노인들로, 영화 상영시간과 무관하게 극장을 찾아 직원들과 대화를 하거나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12시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김전한(80)씨는 “미림극장은 노인들 놀이터”라며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다닌 지는 10년 정도 됐고, 지금도 일주일에 못 해도 두 번 내지 세 번은 온다”며 “요즘 날도 서늘한데 영화 보고, 커피도 마시면서 노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노인정 가면 나는 아직 젊은 사람 취급받고 거기서는 소일밖에 안 한다”며 미림극장이 제공하는 경험은 일선 경로당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70대 여성 A씨는 “나는 동네 사람은 아니고 멀리 산다”며 “20대 때부터 알던 곳인데 오늘 처음 와봤다”고 했다. 이전부터 드나들던 단골들이 있는가 하면, 노인들 사이 알음알음 소문으로 새로이 유입되는 고객도 있었다.
오후 2시, 3회차 상영을 앞두고 더 많은 관객이 밀려 들어왔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왔다는 배원복(83)씨는 이날의 상영작을 가리켜 “서부영화가 실감 나고 재밌다”면서 “미림극장은 심심함을 달래주니 좋다”고 말했다.
배씨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한영(83)씨는 ‘미림극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곳이 전국 각지에 생겨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이런 노인 극장을 찾아 안산, 천안까지도 간다”고 말했다. 그 또한 동네 가까운 거리에 경로당이 있지만,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극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림극장은 “소중한 곳”이다. 그는 “집에서 많이 멀지도 않고, 집에 누워서 TV 보는 대신 전철 타고 와서 놀면 건강에도 좋다. 또 선생님이 여기 와서 강의해주는 거 들으면 배우는 것도 많고 이해도 잘 된다”고 극장의 장점을 늘어놨다.
미림극장은 영화 상영뿐 아니라 독립영화 감독과의 대화, 영화평론가 초청 강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극장을 찾는 노인들에게 ‘노년의 새로운 배움’을 선사하는 기회가 된다.
최현준 대표 “미림극장, 일상적인 공간 되었으면”
비록 작고 오래됐지만 미림극장은 요즘 추세인 대형 멀티플렉스 상영관 못지않게 알차고 풍성하게 운영된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 최현준(47) 대표가 있다.
최 대표는 지난 2015년 미림극장에 운영부장으로 입사했다. 당시 어려웠던 극장의 재정 상황에 입사 첫날부터 빚 독촉장을 받아들었다고 한다. 극장 운영진들이 떠나고 사실상 대표 업무를 하다 2021년 대표 직함을 달았다. 그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문화재단 등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각종 지원 사업을 유치해 미림극장을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미림극장은 사회적기업으로, ‘세대가 함께하는 문화공간, 추억과 역사가 있는 영화관’을 표방하고 있다. 이날 극장에서 만난 최 대표는 “뭔가 거창한 선언보다는 외롭거나 대화가 필요하신 분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오시는 손님 한 분 한 분이 너무 귀하고 감사하다. 이분들이 있어서 극장의 가치가 증명된다”고 했다.
그는 “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를 가족도 아닌 저에게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뭉클하다”며 “극장이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 같아, 극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미림극장을 찾는 손님은 하루 50명 남짓. 푯값도 5000원 안팎이라 일 매출은 2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최 대표는 사회적 기업인 미림극장의 운영이 어려운 건 오늘내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전 극장 건물주가 바뀌며 향후 2년간은 영업 가능할 전망이지만, 그 이후를 기약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는 “건물주를 탓할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건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고, 극장을 유지하고 싶다는 것 역시 우리의 사정인 거다”면서 “극장을 운영하고 싶지만, 이 극장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겠다. 그저 남은 기간 멋지게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담담히 말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지만, 미림극장을 유지하는 건 선뜻 마음을 모은 극장의 후원자들이다. 후원자로는 미림극장 단골손님, 미림극장 직원들의 가족 또는 지인들, 어쩌다 한번 영화관에 들러 본 관객 등이 있다. 영화를 보러 올 때마다 1000원씩 돈을 더 넣어주는 노인들도 있다.
최 대표는 “미림극장이 구호단체나 인권단체는 아니기에 절박성은 떨어진다. 또 문화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후순위기도 하다”며 “그런데도 후원해주신다는 건 극장의 가치에 공감하거나 응원하는 마음에서 하시는 거라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노인에게도 문화공간을…즐거움 드린다는 ‘단순한 목표’로
초고령사회 문턱 앞에 선 한국에서 노인은 어디에나 있는 존재다. 누구나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의 옆자리에 앉거나 그 옆을 지나쳐본 경험이 있다. 반면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노인을 보기가 쉽지 않은 곳도 있다.
최 대표도 “노인들이 문화생활을 하러 갈 곳이 없다. 거기서 미림극장의 콘셉트를 잡았다”고 했다. 그는 “노인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도 그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며 “문화공간 중에도 노인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목표는 단순하다”며 “오늘 하루 잘, 재밌는 영화를 틀고 또 이렇게 행사 있으면 열심히 준비해서 오신 분들께 즐거움 드리면 된다.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
노인의 여유를 닮은 미림극장, 최 대표는 오늘도 ‘단순한 목표’를 위해 영사기를 돌린다.
[人턴]은 스쳐지나가는 일상에서 포착한 ‘낯선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돌아볼 때 일상은 다르게 보이고, 때론 이 낯섦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듭니다. 국민일보 인턴기자(人)들이 시선을 돌려(turn) 익숙하지만 낯선 현장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류동환, 박성영, 이지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