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앨범이어서 내게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악기를 고르고자 했다. 가장 편한 언어로 시작하려는 마음에 내게 모국어나 다름없는 피아노를 선택했다. 이번엔 오롯이 혼자서 얘기할 수 있는 편성을 했고, 앞으로는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작곡가 겸 음악감독 정재일이 24일 서울 종로구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정재일은 이날 유니버설뮤직 산하 레이블 데카에서 데뷔 앨범 ‘리슨’을 발매했다.
정재일은 앨범을 발표하게 된 계기에 대해 “항상 무대 뒤에만 있다가 간담회를 열게 되니 꿈같다. 지난해 데카에서 ‘당신만의 것을 해보지 않겠누냐’고 제안했을 때 처음엔 하지 말까 싶었다”며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음악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 어려운 기회였고 데카가 클래식 레이블이어서 노래에 대한 부담이나 요구가 없었다. 지난 20여년 간 쌓아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재일은 이번 앨범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피아노 중심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펼쳐냈다. 피아노 연주는 전설적인 녹음실로 유명한 노르웨이 오슬로의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현악 사운드는 앞서 ‘기생충’과 ‘옥자’, 정재일의 앨범 ‘시편(psalms)’ 작업에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정재일은 “침잠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겠지만 곡을 만들 때 우선 즉흥연주를 하고 거기서 어떤 부분이 포착되면 다듬어 나가기 시작한다”면서 “어떤 순간을 잡았는데 굉장히 침잠된 순간을 잡았다”고 앨범 구상을 시작했을 당시 돌이켰다.
그는 “한강 하구에 사는데 거긴 조수간만의 차가 있어 물의 흐름이 바뀌고, 철새가 수천 마리 모여들어 왔다갔다 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며 “주변에 습지와 갈대밭이 있고 자동차도 고층빌딩도 있는데 ‘이 풍경에서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만 없으면 정말 아릅답겠다’ ‘바다까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가라앉는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앨범 제목을 ‘리슨’으로 지은 이유도 밝혔다. 정재일은 “나는 원래 듣는 사람이고 다른 예술을 위해 작업하는 사람”이라며 “내 안에서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고 사람들의 말도 듣고 싶고 지구가 하는 말도 듣고 싶었다. 우리가 잘 못 들어서 팬데믹도 겪고 전쟁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앨범을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혼자하는 작업의 장단점은 명확했다. 정재일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감독, 가수, 제작자 등의 컨펌을 받지 않아도 돼 정말 좋았다”면서도 “구상부터 믹싱 작업까지 혼자 맨땅에서 헤딩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음악만 들려드려야 하니 숨을 곳이 없어 더욱 집중하고 장인정신을 발휘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점이 모든 걸 상쇄했다”며 웃었다.
정재일은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드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7세에 밴드 긱스 베이시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패닉 박효신 아이유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곡을 만들고 프로듀싱을 맡았다. 지난 2021년 영상 매체에 쓰인 독창적인 음악에 상을 수여하는 미국 할리우드 뮤직 인 미디어 어워즈(HMMA)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한국인 최초로 상을 받았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은 정재일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는 “‘기생충’으로 인해 내게 많은 일이 벌어졌고 이런 엄청난 기회도 생겼다. 정재일은 몰라도 ‘오징어 게임’ 음악은 전세계인이 알게 되는 명예를 얻었다”며 “두 작품을 통해 영화음악이 뭔지,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생각하게 됐고 영화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 무엇보다 정말 존경해 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영화 ‘브로커 작업’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톰 루이스와 로라 몽크스 데카 공동 회장은 “정재일 음악감독과 함께하게 돼 매우 기대된다. 그의 독특한 작곡 스타일과 접근방식은 정재일의 음악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며 “이미 그의 작품을 통해서 대중의 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음악이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