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신앙]원우현(5)“심문 사항이 反정부 집회 대목에 이르자….”

입력 2023-02-22 09:33 수정 2023-02-24 21:40
1979년 세미나 참석차 방한한 미국 보스턴 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센터 조지 A 기터 교수와 고려대 교정에서 함께 했다. 왼쪽부터 기터 교수, 필자, 스미스 사무국장.

합동수사본부에 수감된 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어디에 와 있는지 조차 순간순간 잘 잊어버렸다.

심문관이 하라는 대로 응대하면서 긴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문 사항이 고려대 교내 반정부 집회에 관한 대목에 이르렀다.

그러자 수사관은 이미 확보한 첩보에 따라 내게 질문하면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경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 학내외 흐름에 관심이, 관여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고려대 교내 시위에 대해 캐묻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누군가를 불러 오라고 지시했다.

“거기 고려대 학생 이리 와 봐요. 5월 달 이날 시위가 몇 시에 어디서 시작이 된 건지 학생이 자초지종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얘기해 봐요.”

그때 지금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이 바로 맨발로 조용히 앉아 있던 그 학생이었다.

“네. 전에 조사 받은 그날 시위 말씀이십니까?”하면서 마치 교가를 낭독하듯 시위의 시간, 장소, 전후관계 상황을 술술 이야기했다.

그는 고려대 시위 주동자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전 의원과 함께 일주일 전에 합동수사본부사에 들어와 심문을 끝내고 맨발로 방에 대기 상태였다.
연재 원고를 쓰고 한강을 산책하는 필자.

교수인 필자는 답답하게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는데 학생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수사관은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수사관은 나를 노려봤다.

“고려대학에선 가르치는 교수는 기억력이 뚝 떨어지고 배우는 학생은 암기력 뛰어나는군요. 교수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어깃장을 놓으면서 핀잔을 주던 기억이 난다.

성북경찰서 유치장 방문은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진술했다.

그런데 그 전 시위 행적은 아는 바가 없다고 하니 그걸 캐려는 수사관의 집요함이 느껴졌다.

나는 종로2가에서 길이 막혀 금호동 할머니 추도식 방향으로 가다가 홍은동으로 귀가한 사실을 반복했다.

하지만 심문관은 시위대 일행을 만나겠다고 정보과장에게 부탁했으니 그 후 당연히 서울역으로 진입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반복했다.

알리바이를 정확히 대라고 했다.

아뿔싸. 할머니 추도식을 가려고 전화한 것, 귀가해 기진맥진 저녁 식사를 한 것을 증명해줄 사람은 일가친척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가족이라고 증거능력이 없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수사관이 말했다.

“내일은 여인을 만나게 해주려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어떤 여자가 왜 합동수사본부에 있는 나를 보러 옵니까. 집 사람 면회 기회가 벌써 되진 않았을 테고요.“

딱딱한 얘기만 오가는 분위기라 수사관이 농담을 던지는 줄 알았다.

다음 날 나를 불러 엄숙하게 오직 진실만을 얘기하라고 당부하더니 다른 수사관이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한 여인이 들어와 의자에 착석했다.

심문관이 그 여자에게 증인선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는 나와 대질 심문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그날 서울역에서 본 하얀 머리 남자가 맞습니까?”

순간 나는 온 몸에 전율이 흐르며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보시고 말씀하십시오.”

“네. 이분은 제가 거기서 본 적이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해 집회시위를 할 때 버스를 밀어 명지대생 전경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은 불행한 그 사건 현장에서 하얀 머리 교수를 봤다는 목격자, 그 증인이 다녀간 것이었다.

갑자기 수배자 명단에 선두로 지목된 이유가 바로 그 목격자의 하얀 머리 증언에서 시작됐다.

즉, 살인교사 혐의가 반 정부 시위 선동에 더해지니 수괴 중에 수괴로 분류됐다.

교수 중에 제일 먼저 연행돼 심문을 받고 요란스럽게 반 정부 투사로 낙인찍힌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위반으로만 심문조서가 꾸려진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수배 과정 중에 어머님과 아내는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아침에 연행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근심 걱정이 많을 때도 주님께 모든 걸을 맡기고 기도했다는 얘기를 귀가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여성 증인과 대질심문 후에 큰 누명을 벗고 보니, 그 다음 심문조사는 시내 시위행진 가담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때부터 모든 걸 수용했고 심문조서에 사인을 했다.

수사관과 나는 서로가 긴 터널을 벗어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수사관이 내게 가볍게 귀띔했다.

“다음 주 종로경찰서 구치소로 이감될 겁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