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수사본부 수사 요원들이 양 옆에 타고 자가용차로 어딘가로 호송됐다. 홀로였다.
주변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서울 서대문 중앙일보 뒤쪽 독립문으로 가는 길모퉁이의 경찰서도 아닌 어느 건물에 도착했다.
곧바로 신상 자술서를 썼다. 참고인이 아니었다. 피의자로 심문 받기 시작했다.
내 범죄의 혐의점을 가늠할 수 있어야 시원시원하게 자백도 하고 부정도 하고 묵비권도 행사할 수 있을텐데….
왜 내가 지명수배 대상이 됐을까.
어떤 범죄혐의가 있는지 머릿속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수사관들이 범죄행각에 대해 확보한 정보와 증거 자료가 무언가 있으니 그렇겠지 추측할 뿐이었다.
낯설고 익숙지 않은 수사를 받아 들이면서 체념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관록이 인상에 꽉 찬 수사관과 마주 앉았다.
흔쾌히 수사관의 심문에 응답할 수 있는 행적이 없었다.
고려대 교수 부임 초 김상협 총장님이 맡기신 신문방송연구소 소장의 임무가 벅차 씨름하고 발전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후, 격동적인 정국엔 관심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소장을 맡은 연구소의 예산 운영에 학교 지원조차 없었다.
연구소 스스로 물적 인적 문제를 잘 해결해야 했다. 당시 나는 아무런 인적 재정적 네트워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학교 당국과 학생 운동권의 대화를 위해 정경대 교수협의회를 구성할 때 무기명 비밀투표 결과에 떠밀려 회장이 됐을 뿐이다.
학생 시위 행렬에 정경대 교수협 회장으로서 지도감독 차 두 번 따라 나선 게 전부였다.
1973년 경희대 교수 시절, 동아일보 광고 사태에 맞서 관등 성명을 대고 기명으로 광고를 한 게 블랙리스트에 찍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였다.
수사관이 의도하는 심의 항목이나 절차와 과정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심리적으로도 힘들었다.
우람한 계엄군이 보초를 서는 상황이 며칠간 계속됐다. 심문에 잘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담당 수사관이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고 심문을 진행했다.
험상궂은 다른 수사관이 불쑥 의자에 걸터 앉고 내 약점을 캐 물었다.
의심쩍은 대목에 대해 추궁하다 말고 돌연히 사라졌다.
당시 취조 과정을 되짚어 보니 다음 4개 항목이 떠오른다.
(1) 총학생회 운동권이 주도한 학내 반 정부 집회를 상세히 묻고 나의 배후 조정 여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2) 정경대 교수협의회 결성과정 및 무명의 초임 교수가 회장에 당선된 내막을 자백하도록 종용했다. 즉 어느 교수 세력이 나를 비밀리 밀고 이용했는지 여부였다.
(3) 5월 13일쯤 4·19묘지 행렬과 다음 날 성북경찰서를 거쳐 시위대와 동행한 이유와 실질적 역할에 관해서 집중 심문했다.
(4) 가장 위중한 혐의 사항은 ‘서울의 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장소인 서울역에 그 시간에 있었는지? 거기 그 시간 동참하지 않았다면 알리바이를 대라고 추궁했다.
그날 버스에 치인 명지대생 전경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불행한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 심문 조사 과정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심문 후반에 근처 다방 마담 증언이 쟁점이 된 걸 감지했다.
그 마담의 말 한 마디로 살인 교사 혐의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머리가 하얀 교수 풍 남자가 버스를 밀치라고 지시하면서 소리쳐 전경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비상 상황이라 변호사도 없었다. 피의자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합동수사본부에서 하루하루 형법, 형사소송법 시간에 허황된 인권 보장을 위한 법체계를 답안지에 쓰던 서울대 동숭동 낭만의 시절이 그리웠다.
서울대 법대 ‘범죄문제 연구회’에서 현장 실사를 위해 여러 선후배들과 그 당시 불광동 넘어 소년원을 방문한 기억도 떠올랐다.
소년원 수용자 실태 조사 중에 내게 심문을 받던 여러 소년원생 얼굴이 아른 거렸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4~6)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