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난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지느러미’가 뭐야?” “얘야, 그거는 물고기의 날개란다.” 아빠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옆에 있던 오빠(초등 3)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녀석이 물어온다. “아빠, 그러면 페스트는요?”
“응 그거는 말야. 중세의 ‘코로나’지.” 아이가 즉각 탄성을 지른다. “아~하!!”
인터스텔라의 김지수 기자는 마음을 캐는 광부라 불리는 송길영을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별히 오해의 거리를 줄이는 사려 깊은 은유, 타인을 향한 손잡이가 달린 어휘를 훈련해야 할듯 싶었다.” 은유와 함께 ‘손잡이가 달린 어휘’가 마음에 콕 박혔다.
앞서 ‘중세의 코로나’라 불렸던 흑사병으로 1330년대 초, 중국 인구 3분의 1 이상이 죽었다. 이어진 14세기 중반, 흑사병은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유럽으로 퍼진다. 이번에는 유럽 인구 7500만명 중 2500만명이 죽었다. 끔찍한 재앙 앞에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들은 신(神)의 존재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며 전기마저 끊긴 어두운 밤이었다. 가족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뜬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깜깜하고 무서운 밤,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아빠가 아이를 꼭 끌어안고 이렇게 속삭인다. “하나님은 어젯밤 천둥 번개 비바람 속에서도 아침을 만들고 계셨단다. 찬란한 이 아침을 말이야!”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중세. 400년 애굽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끄셨듯 하나님은 르네상스의 바로크 시대를 열고 계셨다. 바로크는 하나님이 만들고 계셨던 찬란한 아침이었다. 문화와 예술의 빅뱅이었다. 이때 보내준 사람들이 있었다. 슈베르트 헨델 바흐가 그들이다. 동시대 가장 널리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인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은 고백한다.
“의식적으로 나는 확실히 무신론자다. 하지만 이를 밖으로 떠들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바흐 앞에서는 내가 무신론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기도를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 내가 교회 밖에 있으면 어떻게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나?”
바흐만이 아니다. 베토벤은 어떤가. 그는 욥처럼 고난의 대명사였다. 말할 수 없는 육체의 시련과 마음의 고통을 통과해야 했다. ‘마침내’ 초인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역경을 극복한다. 위대한 음악으로 탄생한다. 클래식 음악은 하나님의 숨결이었고 ‘심폐소생술’이었다. 나 역시 클래식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숨 막힌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영(靈)을 숨쉴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이 시대 팬데믹에 대한 하나님의 심폐소생술은 무엇일까.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인공지능(AI)’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도 ‘강’도 ‘매우 강’도 아닌 ‘초강력’이다. 초강력이라면 건물이 붕괴될 정도다. 지진에 버금간다. 이를 놓고 경희대 이동규 교수의 말마따나 바둑 알파고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다. 작곡에다 추상화까지 그려낸다. 현대 물리학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측한다.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의 가공할 성능은 태풍이 아니라 원자폭탄이다. 빌 게이츠는 챗GPT의 등장을 ‘인터넷만큼 중대한 발명’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구글은 끝났다(Google is done).”
하지만 나는 안다. 인공지능은 가능해도 인공지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화(造花)는 생화(生花)를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뿐인가. 무정란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정란이다. 이쯤이면 김지수 기자가 말한 ‘사려깊은 은유’와 ‘손잡이가 달린 어휘’일 것인가.
이 시대 하나님의 심폐소생술은 다름 아닌 ‘영성(靈性)’이다. 그동안 교회는 찬양과 기도, 말씀의 영성에만 치우치지 않았는지 돌이키게 된다. 이미 영성 건축, 영성 치료, 영성 관광이 눈앞에 와 있다. 영성은 황폐한 마음에 주어진 따뜻한 초콜릿이나 생강차 같은 위안을 넘어선다. 근본적인 재창조다.
이제 두 번째 바로크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중국풍의 ‘시누아즈리(Chinoiserie)’, 이어 19세기 중반 20세기 초의 ‘자포니즘(Japonism)’, 이어 불어닥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한류(Korean Wave)가 그것이다. 한류는 한때의 신드롬이 아니다. 이미 문화와 예술의 장르가 되었고 젊은이들의 취향이 되었다. 윈드서핑을 즐기듯 세계를 누벼보자. 세계 문화의 중심이 된 대한민국,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가슴을 펴고 하나님의 숨결을 들이마시자.
나는 꿈꾼다. ‘K-영성’이 문화와 관광이라는 두 날개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