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고지신’ 열풍…“어른들은 이렇게 재밌는 걸 봤구나”

입력 2023-02-18 23:08 수정 2023-02-19 10:09
최근 개봉해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왼쪽)'과 '타이타닉(오른쪽)' 포스터. 각 배급사 제공

바야흐로 ‘옛것의 전성시대’다. 지난 수년간 20대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뉴트로’ 시대를 지나 이제는 ‘콘고지신’이란 말이 등장했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의 사자성어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콘텐츠(Contents)를 합성한 신조어다. 20세기의 콘텐츠가 21세기 대세로 떠오른 현상을 일컫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콘진원)은 올해 콘텐츠산업을 전망하며 이 같은 ‘콘고지신’을 10대 키워드 중 하나로 제시하기도 했다.

‘옛것’에 대한 애호…낡았는데 세련됐다?

영화 '타이타닉'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2023년 2월 18일 (오후 8시 기준) CGV 연령대별 예매 분포. 박성영 인턴기자

실제 지표를 보더라도 ‘옛것’에 대한 Z세대(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세대)의 관심은 심상찮다.

1998년 영화를 리마스터링(기존 촬영물을 오늘날의 품질에 맞게 조정하는 일)해 25년 만에 재개봉한 ‘타이타닉’과 90년대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는 몇 주간 박스오피스 순위권에서 경쟁하고 있다. 슬램덩크는 지난 16일 누적 관객 300만명을 넘어섰다.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중 2017년 개봉한 ‘너의 이름은’에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20대가 이 흥행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18일 CGV에 따르면 타이타닉과 슬램덩크의 20대 예매비율은 각각 34.7%와 24.6%에 달한다. 타이타닉의 경우 전 세대를 통틀어 20대가 가장 많이 관람하고 있다. 슬램덩크도 30대(34.7%), 40대(27.8%)와 20대의 관람률이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과거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한 콘텐츠가 대개 해당 콘텐츠에 대한 ‘향수’를 지닌 세대를 타깃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다소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상영 중인 CGV 용산역점 모습. 김은초 인턴기자

두 영화의 리뷰 페이지에서는 ‘여태 어른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걸 보고 있었구나’ 같은 한 줄 평이 많은 공감을 받기도 한다. Z세대 관객들이 콘고지신의 주체이자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르게 되는 배경과 경로는 매우 다양하다.

‘부모님 세대’의 손에 이끌려 영화를 봤다가 오히려 본인이 더 열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명 ‘슬친자’(슬램덩크에 미친 자)인 20대 김씨는 18일 “슬램덩크에 대한 추억이 있는 이모와 함께 영화를 봤다가 내가 푹 빠졌다”며 “상영 특전으로 주는 포스터 등을 받기 위해 버스로 1시간 거리의 영화관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20대, 이들은 왜 옛날 영화를 소비하는가
CGV 여의도점에서 18일 슬램덩크 특전을 받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선 사람들. 박성영 인턴기자

무엇이 20대를 이토록 매료시킨 것일까. 18일 오후 CGV 여의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슬램덩크의 뜨거운 인기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입구에 길게 늘어선 대기줄이 눈에 띄었다. 영화관 직원이 ‘특전 배부를 시작하겠다’는 말을 하자 기다리던 사람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직원은 영화표를 확인하고 고객들에게 ‘SLAM DUNK(슬램덩크)’라고 적힌 특전을 배부했다.

개봉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상영관 내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20대 젊은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다.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슬램덩크 특전을 받기 위한 줄이 길게 형성됐다. 영화를 통해 ‘슬램덩크’를 좋아하게 됐다는 여성 김태린(21)씨는 “벌써 세 번이나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여의도 CGV에서 18일 관객들에게 배부된 슬램덩크 특전. 주인공들의 명대사가 적혀있는 카드가 담겨 있다. 이지민 인턴기자

비슷한 시간, CGV 용산역점 역시 특전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긴 줄 끄트머리에 있던 여성 이모(22)씨는 선착순으로 제공되는 특전을 받지 못할까 봐 초조해하면서도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 푹 빠졌다”고 설렘을 드러냈다.

현재 20대는 슬램덩크 향수에 빠져 있는 3040세대보다 한층 더 치열해진 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저마다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도전에 나서는 슬램덩크 주인공들의 모습에 20대 역시 감동하고 위로받고 있다는 얘기다.

CGV 용산역점 상영판에 보이는 타이타닉의 남은 좌석수는 6석이었다. 김은초 인턴기자

재개봉한 지 2주도 되지 않은 타이타닉은 더욱 인기다. 세계 최고의 유람선 타이타닉호에서 만난 잭과 로즈의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을 그린 작품은 98년 개봉 당시 전 세계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다. 25년 만에 전 세계에서 다시 개봉했는데, 관객들의 입소문과 화제성에 힘입어 한국에서의 반응이 특히나 뜨겁다. 미국을 제외하고 한국이 글로벌 흥행 성적 1위를 차지했다.

CGV 용산역점에서 타이타닉 관람 후 제공되는 특전은 개봉 첫 주에 이미 매진됐다. 타이타닉을 보러 온 관람객의 연령대와 성별은 다양하다. CGV 여의도점에서 일하는 직원 김윤(27)씨는 “같이 일하는 20대 중에서도 여러 번 본 사람이 꽤 있다”고 전했다.

태어나기도 전 개봉한 만화나 영화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김옥주(24·여)씨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시각과 청각 등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다”며 “영화화된 작품은 책보다 이해가 쉬워서 과거의 문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김모(28·여)씨도 “책은 읽으면서 상상해야 하는데 영화는 직접 볼 수 있으니까 재밌고 더 와닿는 것 같다”면서 “아날로그적인 옛날 감성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콘고지신, ‘X세대와 Z세대의 결합’…소비자도 프로슈머로 참여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5 개봉) 영화 페이지. 소비자들은 영화 감상 후 감상평을 통해 서로의 감상을 교환하고 있다. 왓챠 캡처

최근 열풍인 슬램덩크(TV만화로 1993년 방영), 타이타닉(1998) 외에도 영화 중경삼림(1995), 매트릭스(1999)까지 Z세대 사이에서 열풍이 거셌다. 하나같이 Z세대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콘텐츠들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은 2013년에 이어 2021년, 22년까지 무려 세 차례나 재개봉하며 인기를 끌었다.

안숭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2000년대 이전 영화가 급부상하는 현상을 ‘X세대와 Z세대의 결합’이라고 봤다. 1990년대 개봉한 영화들은 현재 구매력을 갖춘 X세대(1970~1979년생 사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Z세대의 ‘취향 문화’를 저격했다는 것이다.

특히 ‘레전드 영화’들의 재개봉 배경엔 요즘 Z세대의 콘텐츠 소비방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자발적 거리두기 문화가 확산하고, N스크린(기기와 관계없이 원하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에 OTT 서비스까지 쏟아지면서 Z세대의 과거 영화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다. 여기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살롱문화’가 겹쳐지면서 재개봉관에서 함께 보고 감상을 SNS를 통해 누리는 문화가 확산한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콘고지신 현상이 “전 세대를 포괄하는 극장가의 새로운 수입원이 됐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이전 영화들을 단순히 재개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관객 앞에 선보이고 있다.

‘슬램덩크’는 애니메이션이라 실제 주인공이 없는 영화지만 극장에선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관객들이 과거의 IP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과거 SBS에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 주제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부른 가수 박상민과 팬들이 함께 주제곡을 열창하는가 하면, 더빙에 참여한 성우들이 주인공을 대신해서 관객과 만나는 식이다.

김 평론가는 “새로운 세대에겐 (해당 작품이) 말로만 들었던 작품들이기 때문에 새롭게 콘텐츠 탐색을 하는 계기가 된다”고 부연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은 영화를 보는 주체인 소비자들의 이 같은 활동 자체를 콘고지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안 교수는 “디지털 시대 이후 우린 컨슈머(소비자)이면서 프로듀서(생산자)”라며 “현재는 프로슈머(참여형 소비자)의 삶이 익숙해진 시대”라고 설명했다.

김은초, 류동환, 박성영, 서지영, 이지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