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신앙]원우현(3)구치소 안 학생들이 소리쳤다 “자유 민주주의 만세….”

입력 2023-02-17 16:15 수정 2023-02-17 21:55
고려대학교는 4·18을 기념한다. 3·15 부정선거 후 이를 항의하던 학생들이 정치 깡패들과 부닥쳐 사상자를 냈던 것이 4월 18일이다. 이 사건 다음 날 4·19혁명이 일어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원우현 교수와 제자들이 세미나를 마치고 커피를 기다리는 모습.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천일 숙명여대 교수, 정윤식 강원대 명예 교수, 홍문기 한세대 교수, 라재기 한국일보 대기자, 필자, 정만수 전 숙명여대 학장.

성북경찰서에 이르러 시위학생 대열은 그대로 종로 2가를 향해 행진을 했다.

그 중 일부 십여 명 학생들이 고대생이 잡혀 있는 성북 경찰서를 들러 가야 한다고 소리쳐서 나는 그 권유를 따랐다.

경찰서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차 씨 성을 가진 당시 성북경찰서장이 손에 작은 붕대를 싸매고 P 데모 주동자 앞에서 지친 표정으로 황급히 내게 말을 건넸다.

“교수님이신가요? 마침 교수님 아주 잘 오셨습니다. 아, 글쎄 유치장에 지금 있는 학생들을 10분 안에 풀어주지 않으면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지금 겁박을 계속합니다. 석방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온다고 가정해도, 그 석방 절차를 밟는 행정 서류를 꾸려서 처리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교수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교수님이 직접 이 학생에게 잘 설명해주십시오. 중재자로 해결사로 나서 주시면 저는 정말 고맙지요.”

그러는 사이 사복을 입은 정보과장이 다가왔다.

“저는 고려대 출신입니다. 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유치장에 고려대, 경희대, 외국어대 등 학생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한번 들어가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정보과장을 따라가 보니 구치소 안의 학생들이 모두 소리치면서 “교수님 잘 오셨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만세, 즉시 석방 촉구”라고 외쳤습니다.

정보과장이 한 말씀하시라기에 “여러분 고생하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합니다. 자중자애하고 질서를 지키십시오.”

여기저기서 소리치며 박수치면서 떠들썩했던 구치소 앞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다시 정문 앞으로 돌아오니 검은 경찰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보과장이 차문을 열어주면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는 “우리와 함께했던 행진 대열이 어디로 갔는지 따라가서 동참하고 싶다. 나를 궁금해 할지 모르니 그곳으로 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찰서 차를 타고 선발대를 쫒아가다가 얼마 안 되어서 종로2가 YMCA 건물 근처에서 바로 하차했다. 종로 근처는 이미 여기저기 화염에 휩싸이고 행진 대열로 길이 꽉 막혔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날은 할머니 추도식 날이었다.

종형 집 금호동에서 추모예배를 드릴 예정이었다. 홍은동이 우리 집이라서 시내 전체가 교통 정체인 사정을 감안해서 유진상가에서 국민대로 가는 우회로를 택하려 했다.

그러나 그 지역도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추도식도 마친 시간이 되어서 그냥 홍은동 집으로 귀가하고 말았다.

그날 나의 동선을 하나하나 자세히 여기서 기술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얼마 후에 경찰 특급 수배자로 분류되어서 합동수사본부 수배 명단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유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도피생활을 하다 합동수사본부에 잡혀가서 일주정도 취조를 받는 말미에 진짜 이유를 일부 눈치 챌 수 있었다.
원우현 명예교수가 고려대 인촌기념관 앞에 서 있다.

제57주년 4·19 혁명기념일을 하루 앞둔 2017년 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열린 4·18구국대장정에 참가한 학생들이 힘차게 행진을 하고 있다. 참가 학생들은 고려대 중앙광장을 출발해 국립 4 ·19 민주묘지까지 왕복한다. 뉴시스

바로 서울의 봄날 서울역에서 명지대생 전투경찰이 버스에 깔려 숨진 불행한 사건 때문이었다.

엉뚱하게 내가 그 살인 현장의 교사범으로 지목됐다.

현장 탐문 과정에서 다방 마담의 목격담이 문제였다.

머리가 하얀 교수풍의 남자가 버스를 지휘하면서 그 명지대생 경찰을 바로 치어 사망케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수사팀은 하얀 머리에 학자풍의 남자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는 인물을 수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나는 바로 그날 경찰차를 타고 종로2가에서 하차했다.

서울역 현장까지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아주 높은 인물로 성북경찰서에서 나를 지목했다.

고대생들 데모 행진마다 동행하면서 학생을 선동 격려했다고 오판할 수 있다는 추정까지는 속으로 했다.

하지만 살인교사라는 엄청난 죄목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서울치대 학생회장을 한 최목균 성모병원 치과 과장의 집에서 지내다 집으로 들어간 새벽에 험상 궂은 수사관 3명이 구두 소리를 ‘쾅쾅’거리면서 온 집안을 뒤적거리고는 나를 연행했다.

당사자인 나는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어머니와 아이들이 혼이 많이 났던 것 같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섬뜩하다고 애기들을 하니까 말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베드로전서 2장 19절)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