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공부·인간애 실현…인생의 마라톤, 103세 돼도 멈출 수 없죠

입력 2023-02-15 18:07 수정 2023-02-15 18:16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 2021년 12월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국민일보DB

스마트폰으로 웬만한 일을 다 하는 요즘이지만 전화 한 통 걸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70~80년대에 전화기는 아무나 쓸 수 없는 귀중품이었다. 시민회관에서 추첨으로 집 전화 놓을 이들을 선정했던 시절을 지나 공중전화와 무선호출기가 등장했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진화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이 시절을 모두 겪은 ‘103세 철학자’인 저자는 전화에 얽힌 일화를 추억하면서 기계 발달에 관한 단상을 이렇게 적는다.

“지금은 정말 삶이 편리해졌다. 그렇게 됐다고 해서 기계의 발달만큼 행복해졌을까. 무한경쟁에서 기계가 인간을 이기면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윤리성이 빈곤해지면 메커니즘의 우월성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해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AI) 챗봇의 탄생으로 전 세계가 시끄러운 요즘 곱씹을 만한 말이다.

연세대 명예교수로서 지금껏 저술과 강연, 방송 활동을 왕성히 펼쳐온 저자가 지난해 1년간 육필 원고로 완성한 책이다. 스스로 ‘기맹’(기계 맹인)으로 일컫는 저자가 하루에 몇십 장씩 쓴 원고를 비서인 이종옥 아가페의집 이사장이 타이핑을 했다. 서문에 ‘신앙적 집필의 마지막 열매’란 표현이 등장해 손수 쓴 신앙서적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을 암시했다.

김형석 교수의 '그리스도인으로 백년을' 육필 원고 일부. 이종옥 아가페의집 이사장 제공

292쪽 분량의 책에는 100여년 간 저자를 이끌어 온 신앙과 인연, 사상이 오롯이 집대성됐다. 연세대 은퇴 이후에도 줄곧 일해온 만큼 이번 책에서도 일의 소중함과 가치를 강조한다. “일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는 인류 삶의 가치를 높이며 행복을 더해주는 것에 있다”며 돈이 아닌 가치에 두고 일의 경중을 판단할 것도 주문한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뜻을 위해 주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성실한 주의 종이 돼라”고 당부한다.

‘100세 시대’인 만큼 늙었다는 이유로 배움을 멈추는 건 핑계라고도 한다. 저자는 95세에 이르러서야 몸이 정신력을 따라오지 못함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힘은 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판단에 100세를 넘긴 지금껏 글쓰기와 강연을 지속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돌이켜보면 90 이후의 내 인생을 스스로 포기했다면 나는 신앙적 책임을 포기한 (어떤 의미에서는) 범죄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글을 쓰는가. 크리스천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이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의 마라톤을 늙었다는 핑계로 중단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직 30~70분간 강연할 체력이 있다”는 그는 지금도 강연으로 매주 전국의 강단을 누빈다. 다음 달 25일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저자 사인회를 갖고 직접 독자를 만난다.

책에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민주화 투쟁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아픔을 겪으며 형성된 정치관에 관한 소회도 담겼다. 최루탄이 자욱하던 대학을 떠나면 자유로운 지성인으로 살리라 다짐했지만 정치와 이념에 관한 질문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탈정치적 삶은 사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닌 정도로 모진 세월을 살았다. 지성인은 물론 종교계의 성직자까지도 정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후진국 국민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흘러 자신을 구태의연한 보수 세력으로 바라보는 일부 다음세대에겐 양해도 구한다. “나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해야 했고 반공적 자세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불행한 역사의 산물이다.…사회를 떠난 개인이 있을 수 없고, 시대적 의무를 회피하는 지성인은 악을 범하는 사람이다.”

한국교회엔 기독교 정신으로 ‘세계 시민의식’을 가진 인재를 길러낼 것을 부탁했다. 진실과 자유, 정의를 실현하는 기독교인이 늘면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세계를 이끄는 선진국이 될 것으로 봤다.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책임지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더욱 필요해진다”며 “교회가 이런 일꾼을 키운다면 휴머니즘을 갖춘 민주주의뿐 아니라 하나님나라 역시 이들을 통해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시국을 거쳐 한국교회 신뢰도가 추락한 지금, 교회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노학자의 고언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