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13년 차를 맞은 정부의 ‘성인지 예산’ 제도를 놓고 실효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성평등 제고라는 본래 취지와 무관한 사업들이 성인지 예산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예산 집행 과정에서 성평등 효과를 거두려면 체계적인 성인지 예산 가이드라인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정부의 ‘2023년도 성인지 예산서’에 따르면 올해 성인지 사업은 38개 중앙관서의 302개로, 전체 사업 규모는 32조7123억원에 달한다. 성인지 예산은 매년 목적을 두고 책정되는 별도의 예산이 아니라 기존 사업에서 성평등 효과를 내거나 남성 또는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예산을 분류한 것을 뜻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회계연도에 도입돼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문제는 양성평등과 크게 관련이 없는 사업 예산도 성인지 예산으로 집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매년 성인지 예산이 발표될 때마다 성평등 실현이라는 목적에 맞지 않는 사업이 마구잡이로 포함됐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올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338억원이 배정된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립극장 운영 사업이 좋은 예다. 정부는 해당 사업을 성인지 사업으로 분류하며 “성별을 고려한 공연 기획 및 고객 편의 서비스 제공을 통해 성별 간 균형잡힌 고객만족도를 제고하겠다”고 밝혔지만 공연장 운영과 성평등은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올해 농림축산식품부의 농기계 임대 사업 명목으로 248억원을 배정했는데, 이 사업도 성인지 사업으로 묶였다. 농기계 구입이 어려운 농가에 농기계를 빌려주는 사업 과정에서 여성 농업인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이유다. 199억원 규모로 책정된 경찰청의 수사부서 사무환경 개선 사업도 올해 성인지 예산에 포함됐다. 경찰서 수사부서(수사·형사과)에 방문하는 남성 혹은 여성 민원인이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성인지 사업 302개 가운데 양성평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직접 목적’ 사업은 96개에 그쳤다. 나머지 206개 사업은 ‘간접 목적’ 사업으로, 성평등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산 규모로 따져봐도 직접 목적 사업은 14조원에 그쳤지만, 간접 목적 사업은 이보다 4조원 가량이 더 많은 18조원 규모로 파악됐다.
현재 성인지 예산과 관련해 의무 편성 비율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편성 촉진을 위한 인센티브도 딱히 없다. 각 부처가 제출하는 성인지 예산안도 형식적이고,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도 전무하다. 이에 따라 정부가 매년 성인지 예산 분류에만 그칠게 아니라, 성평등 기조가 예산 수립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소한 성인지 예산에 대한 명확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때인 지난해 2월 유세 도중 “우리 정부가 성인지감수성 예산이란 걸 30조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 돈이면 그중 일부만 떼어내도 우리가 이북(북한)의 저런 말도 안 되는 핵 위협을 안전하게 중층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발언했다. 정부가 성인지 예산을 별도로 편성·집행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오해를 막기 위해 성인지 예산 제도의 취지를 국민에게 적극 설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세종=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