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의 여인과 함께 검찰청 입구에 들어서자 직원이 짜증이 잔뜩 섞이고 퉁명스러우며 권위적인 말투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언감생심 친절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짜증을 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치며 민원실로 들어섰다. 이 여인은 범죄피해자 유족구조금을 신청했으나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어 재심을 신청하기 위해 어렵게 검찰청에 들른 것이다.
여인은 범죄로 딸을 잃은 말 그대로 ‘범죄피해자 유족’이다. 이 가족의 비극은 30대 중반의 딸이 30대 후반의 한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차례 이혼을 경험한 딸은 죽을 때까지 이 남자가 조직폭력배이고 수많은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자신에게 가끔 폭력을 저지른다고만 생각했다. 사실혼 관계 4개월 동안 수시로 폭행을 당했음에도 딸은 이 남자를 ‘가장 의지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표현할 정도로 믿었다.
그러나 남자가 여인의 딸에게 가한 폭력의 잔인성은 남자에 대한 형사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피고인은 금전 문제와 피고인의 전처와의 관계 문제로 말다툼을 하던 중 화가 나 피해자의 목을 조르고, 머리를 바닥에 내려치며, 주먹과 손바닥으로 피해자의 얼굴 부위 등을 수회 때리고, 발로 머리를 밟아 피해자에게 약 6주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두개골 전두개저의 골절 등의 상해를 가하였다.”
그날, 여인의 딸은 “너한테 맞아죽으나...목졸림을 당해 죽는 것보단 내 스스로 죽는 게 나을 거 같다.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재떨이를 얼굴에 들이 붓고...날 죽이려고 목을 조르고...바닥에 머리를 내려치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발로 내 머리를 그렇게 지근지근 밟고...내가 축구공이니?”라는 문자와 멍으로 가득찬 얼굴 사진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남자에게는 4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범죄피해자구조심의위원회는 “피해자가 자살을 했으므로 가해자의 상해행위와 피해자의 사망 간에 인과관계가 없어서 유족구조금을 지급할 수 없다”라고 결정했다.
정채봉 시인은 ‘만남’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만남을 다섯 가지로 나눈 바 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꽃송이 같은 만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같이 허무한 만남이고, 지우개 같은 만남은 헛된 만남이며, 건전지와 같은 만남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만남이다. 다섯 가지 만남 중 최악의 만남은 생선 같은 만남인데, 만나면 만날수록 부패한 냄새를 풍기며 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만남이다. 이렇게 네 가지 만남은 모두 이기적인 만남으로 만나지 아니함만 못한 만남이다. 그나마 가뭄에 단비처럼 이타적인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어서 인생이 버텨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인의 딸과 조직폭력배 남자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을까. 나는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될 수 있을까.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