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일병 죽음의 진짜 이유는…‘애인 변심’이 아니었다

입력 2023-01-31 14:47
국민일보DB

병영 부조리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병사의 사망 원인이 군 기록에서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토사물을 먹으라고 강요당하는 등 명백한 부조리를 당한 사실이 35년만에 드러나며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다.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전날 제59차 정기회의를 열고 1988년 숨진 강모 일병 사건의 개요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31일 밝혔다.

당시 강 일병의 사망과 관련한 군 기록을 보면 ‘빈곤한 가정환경 및 애인 변심 등을 비관하는 한편 휴가 중 저지른 위법한 사고에 대한 처벌을 우려하다가 자해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전혀 다른 조사 결과를 내놨다. 애인 변심이라고 적힌 군 기록과 달리 강 일병은 복무 중 애인 자체가 없었으며 가정환경도 유복했고, 휴가 중 사고를 저지른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망 전날 열렸던 상급자 전역식에서 상급자가 구토하자 토사물을 먹으라는 강요를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강 일병이 이를 거부하자 심한 구타를 당했고 이로 인한 모욕감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위원회는 판단했다.

위원회는 “개인적 사유가 아닌 부대 내의 만연한 구타·가혹행위 및 비인간적 처우 등이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강 일병과 함께 1982년 숨진 김모 병장 사건의 개요도 공개됐다. 군 기록에는 김 병장이 연말 재물조사 결과보고서를 잘못 작성해 인사계로부터 질책받고 이를 비관해 숨졌다고 돼 있다.

그러나 위원회 조사 결과 부대에서 부당한 요구를 해 김 병장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것으로 드러났다. 김 병장은 수년간 누적된 보급품의 손·망실 상황을 발견하고 보고했지만, 부대에서 오히려 그에게 손실분을 채워놓으라고 요구해 심한 압박에 시달렸음이 파악됐다.

부대 차원에서 김 병장이 숨진 후 군이 부대원들에게 거짓 진술을 종용한 정황도 포착됐다. 또 유가족이 원인을 알지 못하도록 고인과 고향이 같은 부대원은 급히 전출시키는 등 은폐 시도가 있었던 점도 드러났다.

위원회는 강 일병과 김 병장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재심사해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해줄 것을 국방부 장관에게 요청했다.

강 일병과 김 병장 외에도 1994년 훈련 중 열사병 증상을 호소하며 쓰러진 뒤 상급자에게 구타당하고 방치돼 숨진 군인, 1953년 6·25전쟁 중 실종됐다고만 기재됐으나 실제로는 적군 폭격으로 숨진 노무자 등의 사망 원인이 규명됐다.

이날 회의에서 진상 규명된 사건들은 일정 기간 경과 후 공개가 가능하다. 위원회는 이날까지 이미 접수된 1787건 중 1510건을 종결하고 277건을 조사하고 있다.

위원회는 오는 9월로 예정된 활동 종료 전에 모든 진정 사건의 조사를 마무리한다는 목표로 정기회의 외에 임시회의도 열어 속도를 내기로 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