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진보 인사들이 북한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을 만들고 이적 활동을 한 정황을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포착해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방첩당국은 그간 압수수색 등을 통해 북한 지령문 등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진보 진영 측은 “해묵은 공안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9일 방첩당국에 따르면 국정원과 경찰은 제주지역 전·현직 정당 간부 등 3명을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 등)와 제8조(회합·통신 등) 위반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다.
진보당 전직 간부 A씨는 2017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뒤 현직 간부 B씨와 농민단체 간부 C씨를 포섭해 ‘ㅎㄱㅎ’라는 지하 조직을 결성해 반정부 투쟁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ㅎㄱㅎ’는 ‘한길회’의 초성을 따 붙인 이름으로, ‘조국 통일의 한길을 수행하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알려졌다. 이들과 접선한 북한 공작원은 노동당 대남 공작 부서인 문화교류국(옛 225국) 소속으로 조사됐다.
국정원 등은 A씨 등이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북한으로부터 ‘촛불 세력 연대를 통한 반정부 투쟁’ ‘정치 집회 공작을 통한 윤석열 정부 타격’ 등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의심한다. ‘민주노총 산하 제주 4·3통일위원회 장악’ 등의 지령도 받았다는 게 방첩당국 판단이다. 이들은 하달된 지령 중 일부를 실제 이행했다고 북측에 보고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앞서 방첩당국은 지난해 말 2차례 압수수색을 통해 혐의와 관련된 증거를 다수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등은 이들이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 교신할 때는 암호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등 사이버 수단을 활용하고, 음어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또 제주 지역 외에도 경남, 전북 등 전국에서 북한 연계 조직이 활동 중인 것으로 보고 동시다발적인 강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상황에 따라 앞으로 대규모 간첩 사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진보 진영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제주 지역 32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안탄압 저지 및 민주수호 제주대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진보진영에 대한 탄압이자 공안사건 조작”이라고 비판했다. 진보당 제주도당 관계자도 “현 정부의 진보진영 말살 정책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했다. A씨를 비롯한 피의자들도 혐의를 부인하며 국정원 조사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