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링∼띠리링∼’ 전화벨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발신자를 보니 부장님이다. 돌연 싸늘한 긴장감이 감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감각도 느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대략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새하얀 백지상태다.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한 뒤 가까스로 통화를 시작하는 자신을 보며 생각한다. 대체 이게 뭐라고….
현대인의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전화 통화’가 누군가에겐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공포’로 변했다.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통화에 불안감을 느끼고 기피하는 이른바 ‘콜 포비아’(call phobia·통화 공포증)의 출현이다. 콜 포비아에 시달리는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뿐 아니라 이들과 원활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기성세대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10명 중 7명이 ‘콜 포비아’
광고대행사 신입사원인 이승윤(가명·28)씨는 심각한 콜 포비아를 겪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직 업무가 숙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장 상사나 고객인 광고주와 전화하는 일이 어렵기만 하다. 이씨는 6일 “고객사와는 갑을 관계가, 부장님하고는 상하 관계가 형성돼 있다. 주의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전화가 걸려올 때면 식은땀이 날 정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 공포증은 비단 직장 생활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전화 통화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빈번하다. 음식을 배달시킬 때, 상품과 관련한 문의를 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전화 통화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생 최연주(가명·24·여)씨는 “음식 배달 전화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한 번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배달온 적이 있었는데, 매장에 전화해서 말하면 될 걸 그러지 못해 그냥 감당했다. 모든 문의는 애플리케이션(앱)이나 AI 채팅봇을 활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윤승철(가명·26)씨는 “가족, 친한 친구 외의 전화는 거의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미리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해본다”며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할 때도, 학교에 문의할 때도 이메일을 활용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들의 콜 포비아는 취재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 사람 모두 익명으로, 대면이나 전화가 아닌 서면 인터뷰를 전제로 취재에 응했다. “전화하는 상황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거부감이 든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낯선 이와 전화할 때면 긴장감을 느낀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답변이었다.
국민일보는 MZ세대의 콜 포비아 실태를 확인해보기 위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만 19~39세 남녀 519명을 상대로 구글 시트를 이용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중 응답자 365명에 해당하는 70.5%가 ‘콜 포비아를 겪은 적이 있거나 겪고 있다’고 답했다. 열 명 중 일곱 명이 통화 공포증을 겪는 셈이다.
이들은 콜 포비아를 겪은 이유로 ‘즉각 대답해야 하므로 말실수를 할 수 있다는 압박감’을 66.7%(복수응답)로 가장 많이 선택했다. 다음으로는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해서’(50.4%)가 응답률이 높았다.
비대면 소통이 편해서(32.5%), 말을 잘 못 해서(30.1%), 상사와의 통화로 인한 두려움 혹은 트라우마(27.6%)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외에 “대화 공백을 참기 힘들어서” 등의 의견도 있었다.
가장 선호하는 소통 방식으로는 응답자의 69.9%가 카카오톡, 이메일 등 텍스트 메신저를 택했다. 전화 통화는 8.1% 수준으로, 오히려 대면 소통을 선택한 응답자가 19.1%로 두 배 이상 많았다.
가속화된 콜 포비아, 자문업체까지 등장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일상화된 비대면 문화가 가뜩이나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층의 콜 포비아 현상을 가속화했다고 진단한다. 전화가 주요 소통 수단이었던 기성세대와 달리 디지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굳이 전화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명국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콜 포비아는 젊은층에서 확연하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유저인터페이스(IU) 환경에 익숙한 젊은층의 소통 방식과 코로나19로 유발된 사회 전반의 변화가 결합하면서 콜 포비아가 확산했다”고 분석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젊은층은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메시지에 익숙해져 있다. 온라인을 통한 간접 접촉이 주된 소통이 되면서 통화에 어려움을 겪는 흐름이 나타났다”며 “코로나 발발로 대면 만남이 줄어들면서 이 같은 어려움은 더 가중됐다”고 진단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전화 공포증은 해외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캐나다 기업인 메리 제인 콥스는 지난해 직원들의 전화 공포증을 해결하려는 기업들을 타깃으로 자문업체 ‘더 폰 레이디’(The Phone Lady)를 설립했다. 1대1 코치 서비스 비용이 시간당 480달러(60만원)에 달한다.
그렇다면 콜 포비아는 사회공포증이나 강박증 등 심리 치료가 필요한 불안장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정신과 전문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콜 포비아를 두고 “정신 병리적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청년층이 전화라는 소통 수단에 익숙지 않아서 피하는 것일 뿐 단순한 사회 문화적 변동에 기인한 현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백 교수는 통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원한 환자들의 사례도 소개했다. 그는 “전화를 두려워하거나 콜 포비아를 앓고 있다는 이들을 진료해보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일상생활도 멀쩡히 하는데 그냥 전화를 피하고 싶은 것일 뿐”이라며 “소통 방식이 다변화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전화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진 것이므로 콜 포비아에 정신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기성세대는 간결하게… 젊은 층도 습관 들여야”
이런 젊은층과 달리 수직적인 상명하복 조직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에게 전화 통화는 가장 빠르고 편한 소통법이다. 이처럼 세대 간 상이한 소통 방식은 조직 내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국내 모 시중은행 부장 윤승준(51)씨는 “평소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이었는데 얼마 전 동료 후배로부터 젊은 사원들에게는 일방적이고 무례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다”며 “통화할 일이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부터 우선 묻는 편”이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로선 수십 년 고수해온 소통 방식을 MZ세대 기준에 맞춰 바꾸기가 쉽지 않다. 신입사원들이 혹시 나를 ‘꼰대’로 여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 등을 갑작스레 활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되, MZ세대와 통화할 때는 되도록 간결하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나이 든 이들은 통화할 때 대체로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며 “젊은 세대와 통화할 때는 용건만 간단하게 하고 주제에 무관한, 특히 사생활 관련 이야기들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젊은 세대 역시 필요한 전화라면 회피하지 않고 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피를 넘어서 ‘공포’가 되면 소통의 단절을 부르고, 이는 인간 소외와 세대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임명국 교수는 “SNS 소통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떻게든 자꾸 오프라인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며 “콜 포비아를 앓고 있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1일 1통화’를 하는 걸 추천한다. 심리학에서 점진적인 노출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소통의 단절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곽금주 교수도 짧은 통화일지라도 횟수를 점차 늘려나가라고 주문했다. 그는 “기성세대 중엔 문자 소통에 원활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또 문자에는 순간의 감정이 담기지 않기에 통화를 선호하는 것”이라며 “상사와의 통화가 어렵더라도 업무상으로 필요하다면 회피하지 않고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적응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조언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
류동환 인턴기자
이지민 인턴기자
박성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