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 대리를 맡은 회사가 “가집행을 막아달라”며 준 돈을 사적으로 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변호사가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허정인 판사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변호사 A씨에게 최근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A 변호사는 2019년 민사소송을 대리하던 B사로부터 업무상 명목으로 받아 자신의 은행계좌에 보관하고 있던 돈 일부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B사는 2017년부터 다른 회사와 벌이던 민사소송 1심에서 ‘7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취지로 일부 패소하고 항소했는데, 법원이 1심 판결의 가집행을 근거로 압류 및 추심명령을 내리자 이를 막기 위해 A 변호사에게 공탁(금전 등을 법원에 맡기는 것)을 의뢰했다.
이후 B사는 민사소송 항소를 포기하고 A 변호사에게 7500만원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A 변호사는 이를 거부하고 아내에게 500만원을 생활비로 보내는 등 1060만원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B사가 A씨에게 2억원의 채무가 있다는 이유였다.
A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7500만원을 받을 당시 ‘민사소송이 끝나고 공탁금을 회수할 때 (채무액을) 상계할 수 없다’는 조건을 붙인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항소 취하로 공탁 필요성이 사라졌으니 B사에는 자신에 대한 민사상 금전반환채무만 남아있다는 취지였다.
1심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를 선고했다. 허 판사는 “민사소송이 종료돼 위탁목적 및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해도, 피고인은 수령한 돈을 그대로 반환할 의무가 있다”며 “이를 단독 상계 처리한 것은 횡령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B사가 A 변호사에게 갚아야 할 2억원의 돈이 있었음은 재판에서도 인정됐다. 하지만 허 판사는 “공탁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을 당시 그 용도나 목적이 사라질 경우 상계할 수 있다는 별도의 특약을 했다고 볼 자료가 없다”며 “피고인은 (7500만원을) 가집행 판결에 따른 공탁금 명목으로 사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공탁금을 바로 상계했다면 다른 사람의 재물을 자기 것처럼 이용·처분하려는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돼 횡령죄가 성립됐겠지만, (항소 취하 후) 그 목적·용도가 소멸된 뒤 상계하면 횡령죄가 부정된다”는 A 변호사의 주장에 대해서도 허 판사는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허 판사는 다만 “피고인이 B사로부터 상당 기간 채권을 추심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이 사건 범행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 점 등을 양형 조건에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