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및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받는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가운데 표결에 앞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피의사실과 직결되는 증거들을 대거 공개한 것을 놓고 ‘피의사실 공표’ 논란이 일고 있다.
한 장관은 28일 국회에서 노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전 발언대에 나서 범죄 사실 요지를 설명했다. 그는 “노 의원은 2020년 2월부터 12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브로커 박모씨 측으로부터 발전소 납품사업 청탁 명목, 용인 물류센터 인허가 알선 청탁 명목, 태양광 발전사업 청탁 명목, 국세청 인사 청탁 명목, 동서발전 인사 청탁 명목 등으로 6000만원의 뇌물 및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 장관은 “이 사안에 대해서는 노 의원이 청탁을 받고, 돈을 받는 현장이 고스란히 녹음된 파일이 있다”며 “구체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저번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저번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는 목소리, 돈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녹음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밖에도 ‘귀하게 쓸게요, 고맙습니다, 공감 정치로 보답하렵니다’라는 노 의원의 문자도 있고, ‘저번에 도와주셔서 잘 저걸 했는데 또 도와주느냐’는 노 의원의 목소리가 녹음된 통화 녹음파일도 있고, 청탁받은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노 의원의 문자도 있고, 청탁받은 내용이 적힌 노 의원의 자필 메모와 보좌진의 업무 수첩도 있으며, 공공기관에 국정의정 시스템을 이용해 청탁 내용을 질의하고 회신하는 내역까지 있다”고 덧붙였다.
한 장관은 “저는 지난 20여년간 중요한 부정부패 수사 다수를 직접 담당해 왔지만 부정한 돈을 주고받는 현장이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녹음된 사건은 본 적이 없다”며 “뇌물 사건에서 이런 정도로 확실한 증거들이 나오는 경우를 저는 보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한 장관은 “2022년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공직자라도 직무와 관련된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고, 명확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이 조작한 거라고 거짓 음모론을 펴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구속 수사를 받게 된다”며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이 당연한 기준이 노 의원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저는 찾지 못하겠다. 상식적인 국민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노 의원은 체포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한 장관이 언급한 내용과 같은 일부 정황이 보도되자 허위사실이라고 반발한 바 있는데, 본회의장에서 한 장관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 장관의 이례적인 발언에 일부 의원석에서는 항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노 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한 장관이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차고 넘치면 왜 조사 과정에서 묻지도 제시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느냐”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갑자기 ‘녹취가 있다, 뭐가 있다’고 하는 것은 방어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이어 “더구나 한 장관은 개별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는다고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그런데 국회 표결에 영향을 미치려고 구체적으로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말하는 것, 이런 정치검찰의 수사를 믿을 수 있는 것이냐. 이건 정상적인 수사가 아니라 사람 잡는 수사”라고 항변했다.
노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민주당 쪽에서는 “힘내라”는 응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부 의원은 “한동훈 장관 (휴대전화) 비밀번호나 공개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본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피의사실 공표’ 공방은 계속됐다.
민주당 안호영 수석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한 장관을 겨냥해 “오늘 국회 본회의에 검찰 수사팀장으로 섰느냐”며 “한 장관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체포동의안에 대해 객관적 사실을 보고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에 판단을 맡겨야 했지만, 검찰 수사팀장의 수사 결과 브리핑을 보는 듯했다. 한 장관의 발언은 명백한 피의사실 공표”라고 맹비난했다.
이어 “검찰 대변인처럼 주관적 의견을 앞세우며 검찰의 조작 수사를 옹호했다. 진영 논리를 운운하며 야당을 공격한 것은 자기 정치이고, 장관으로서의 직분을 망각한 추태”라면서 “다가올 국민의힘 전당대회 출마를 염두에 두고 정치연설을 한 것이냐. 본분을 저버린 피의사실 공표와 자기 정치는 체포동의안의 부결을 불러왔음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노 의원 체포 동의안은 재적 271명 중 찬성 101표, 반대 161표, 기권 9표로 부결됐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되는 체포 동의안 표결은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이 돼야 가결된다.
한 장관은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이날 표결 결과에 대해 “이게 잘못된 결정이란 건 국민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한다”며 “국민도 오늘의 결정을 오래도록 기억하실 것”이라고 비판했다.
본인의 발언을 노 의원이 반발한 데 대해선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책임을 가지고 드린 말씀이다. 증거관계나 범죄 경중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했다. 본회의장에서 녹취파일에 대해 공개한 것이 방어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원들이 체포동의서 내용을 못 보셔서 그런 것 같은데, 체포동의안에 들어있는 구속영장의 사유에 그 내용이 다 기재돼 있다”고 맞받았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