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전투 중” 우크라 파병 미군이라더니…‘로맨스스캠’ 사기

입력 2022-12-15 14:24 수정 2022-12-15 14:57
지난 1월 1일 로맨스스캠 피의자와 피해자의 메신저 대화 내용.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제공

지난 1월 1일 A씨는 예멘에서 일한다는 미국 의사 B씨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전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국제택배로 A씨에게 보내려고 하니 약 3000만원의 운송비를 부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B씨는 “전쟁터에는 은행이 없어 돈을 개인 계좌에 넣을 수 없다. 딸들은 너무 어려서 돈을 맡길 수 없으니 이 돈을 맡아달라”고 A씨를 설득했다.

A씨는 우려도 됐지만, 세계보건기구 산하에서 일한다는 B씨와 오래 전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신뢰와 애정을 쌓아왔던 터라 선뜻 돈을 입금했다. B씨는 “2월에 한국에 들어오면 함께 지내자”고도 했다. 하지만 B씨는 택배를 보내지도,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의사가 아닌 로맨스스캠(Romance Scam·친밀감을 이용한 사기) 조직의 조직원이었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국제범죄수사계는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10월까지 전쟁에 파견된 군인·의사 등을 사칭해 피해자들을 속여 37억원을 가로챈 로맨스스캠 사기조직 일당 12명을 붙잡아 검찰에 송치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중 인출책을 관리하던 기니 국적의 국내 총책 C씨(33) 등 6명은 구속됐다.

피의자 12명 중 계좌를 빌려준 한국인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은 나이지리아, 기니, 말리 등 외국 국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미국 군인·의사, UN·환경단체·선박회사의 직원 등 전문직을 사칭해 피해자에게 접근, 31명의 피해자에게 37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주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메신저를 통해 피해자에게 친구 맺기를 신청하거나 팔로우를 한 후 메시지를 보내 대화를 시작했다. 전문직을 사칭하며 위험한 전쟁 현장에 있는 것처럼 조작된 본인 사진을 보내 신뢰를 쌓았다. 상대가 믿고 호감을 느끼면 짧게는 수십일, 길게는 1년까지 메신저로 대화를 이어가며 교감을 쌓았다.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정부로부터 받은 돈을 한국으로 보낸 후 함께 지내고 싶다”며 “이 돈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피의자들은 돈을 보내는 과정에서 필요한 운송비와 통관 비용 등이 필요하다며 이를 대신 내달라고 요구했다. 피해자들은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보냈는데, 실제로는 로맨스스캠 조직의 계좌로 입금됐다. 인출책들은 인출 당시 입었던 옷과 모자 등을 태우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로맨스스캠 조직원이 지난 7월 서울 동작구의 한 은행 ATM에서 범죄 피해금을 인출하는 모습.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제공

국제 정세까지 동원해 피해자들을 속이기도 했다. 일부 피의자들은 자신이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미군이라고 속인 후 상대에게 “오늘도 전투를 하고 있다” “폭격 소리가 들린다” 등의 얘기를 하며 신뢰를 쌓았다. 대부분 40·50대인 피해자들은 평소 접해보지 못한 얘기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대화를 시작했다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지만, 일부 피해 남성에게는 가해자들이 여군이나 환경단체 직원을 사칭하는 등 성별까지 속이며 접근했다.

경찰은 지난해에도 라이베리아 국적 등 조직원 14명을 검거해 10명을 구속했다. 이번 피의자들까지 포함해 총 피해자 57명에게 가로챈 금액만 57억원에 달한다. 경찰은 올해 2700만원을 비롯해 총 1억2400만원의 피해 금액을 회수했다.

김기범 마약범죄수사대 국제범죄수사1계장은 “해외에 있는 총책 등은 검거하지 못했지만, 검거된 일당의 추가 여죄를 확인하면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로맨스 사기 조직 일당에 대한 검거 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