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개성 있는 연기로 존재감 드러내는 극단 백수광부 배우 박정민

입력 2022-12-13 09:22 수정 2022-12-13 09:39


“극단 생활 15년 만에 배우로 희망을 봤습니다”

극단 백수광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정민 배우를 인터뷰하기로 한 것은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를 본 후였다. 이 작품을 움직여 낸 것은 배우 박완규의 연기였다. 극 중 인물 진영으로 분한 배우의 연기가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정점(頂點)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올해 ‘2022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서교동에서 죽다, 겹괴기담,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1부)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연극 리뷰를 쓴 작품이었고, 윤시중 연출은 이 작품을 공연할 당시 인터뷰를 했었다. 작품에서 형으로 분한 박정민은 화술의 독특함으로 배우 자신의 언어로 숙성된 감각을 보여주었고 캐릭터는 극 속에 용해(溶解)되어 있었다. 지난해 초여름쯤 박정민 배우한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박정민입니다. 우리 극단에서 서교동에서 죽다 초연하는데요. 작품 괜찮아서 밀양공연예술축제에 추천하고 싶습니다. 희곡을 보내겠습니다. 꼭 좀 검토해 주십시오”
당당한 말투는 기획자로도 유연함을 보였고 희곡만으로 그해 축제에 유일한 공식선정 작품이 되었는데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을 보지 못했다. 기억이 퇴화하는 시대에 극 중 인물 진영의 기억을 복원하고자 과거-현재 공간을 무대 3면으로 배열해 기억의 시간 이동을 입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감각과 배우가 돋보였다. 희곡만 읽고 작품을 선정한 것이 걸렸었는데, 밀양공연예술축제에 공식초청 작품으로 공연을 못 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수작(秀作)이었다. 재공연의 기억을 되살려 작품을 연극평론으로 담아냈었다.


대구출신인 배우 박정민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연극, TV, CF 등에서 활동했고 SBS 프로덕션에서 3년 6개월 정도 PD로 근무하다가 극단 백수광부는 2008년도에 입단했다.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서 장두이 선생님을 따라다녔어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다가, 인터넷에서 백수광부라는 극단이 단원 모집을 하는 걸 보고 지원하게 됐죠. 그 전엔 2005년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공연 <당나귀 그림자 소유권에 관한 재판>을 비롯해 한 세 작품 정도 했어요” 백수광부 단원이 된 뒤로는 기획(프로듀서))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드라마 영화 출연에도 활동이 늘어나면서 6년 정도 극단활동에 공백기를 가졌다. 백수광부 작품으로는 16개 작품 정도를 공연했는데 연극 <최서림 야화순례 기행전>에서는 캐릭터는 보이는데 안정된 연기가 아쉬웠고, 김봉달로 분한 <다방>에서는 극 중 인물로 작품을 끌고 가는 여유가 보였다. <서교동에서 죽다>와 몇 작품부터 캐릭터가 보이고 연기가 안정되면서 극에서 인물이 살아있었다. 뭘 해도 튀어 보이는 행동과 말투, 언어를 유연하게 숨기면서부터 인물은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연극, 영화, TV에서 그를 찾았다. 인터뷰를 끝내고는 포항으로 가야 한다며 백팩과 롱패딩을 걸치고 들어섰다. 그는 기차 시간을 알려줬고 10여 차례 시계를 봤다.


| <서교동에서 죽다> 이야기

작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는 70∼80년대 부촌(富村)으로 상징되던 서교동 주택가 시절도 소환되고 아버지 사업 실패로 화곡동 시장통으로 이사해 능숙한 솜씨로 연탄불을 갈아치우던 기억들로 포개진다. 엄마의 과일가게 장사 이야기, 고교 시절 안국동 운현극장 김인태 배우의 <세일즈맨의 죽음>의 기억들, 버스를 타고 서교동 작은아버지 댁으로 심부름 다니며 객기로 ‘시장통 아이’가 되어가는 진영과 진수의 과거들이 흑백사진의 선명한 이미지로 재생된다. 작가의 과거 기억들은 홍대 입구 사거리 찌개 집 2층에서 문득 내려다본 풍경을 통해 과거 이미지가 재생된다. 청기와 주유소 인근 서교동 주택가가 개발되기 이전 개천가에서 뛰어놀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그 후로부터 10년에 걸쳐 아이의 모습이 잊을만하면 떠오르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작가 기질로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기억의 정점(頂點)에는 동생의 죽음과 가족의 삶, 아버지의 죽음이 맞닿아 있다. <서교동에서 죽다>는 자전적 이야기이면서도 흉터로 패어 있는 가족사를 통해 죽은 동생과 마주하고, 아버지 사업 실패로 서교동을 떠나 연탄불을 갈며 버티던 화곡동 시절과 죽음들을 기억해 낸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내밀 때는 등장인물과 마음이 동화되고 짠하다. 기억은 서사의 중요한 극적인 장치로 활용되기도 하고 뻔뻔한 작가의 상상력이 발동되어 서사를 확장하기도 하지만 <서교동에서 죽다>는 서술 장치에 기술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기억이 퇴화되어가는 시대에 70년대는 나의 이야기이고, 시대의 상처이기도 했다.


─ <서교동에서 죽다>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22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들었지요.

“작년에 초연을 올리고, 올해 베스트3에 들었습니다. 사실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작업할 때도 텍스트가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느낌이 있어서 이걸 어떻게 극으로 풀어야 하나 연출부와 배우들이 굉장히 고심했습니다. 작가님 몰래 대본 수정을 한 부분도 있어요. 지금은 다 아시게 됐지만(웃음). 고영범 작가님이 뉴욕에 계셔서 한국에 못 들어오시는 상황이라, 저희끼리 텍스트를 만들어간 부분이 있어요. 연출님이 그림을 잘 그려주셨죠.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빈 공간과 같은 무대에서 연극적으로 잘 풀어냈어요. 거기에다 박완규라는 걸출한 배우가 중심을 잘 잡아줬습니다. 다른 배우들도 주인공을 잘 뒷받침해서 좋은 앙상블을 만들어냈던 점이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박완규 배우가 동생 역할을 맡았죠. 동생의 기억으로부터 과거들이 펼쳐지고, 잊히었던 70~80년대의 기억들이 다시 소환되잖아요. 그 속에서 가장 아픈 사람은 동생인데, 반면 형은 너무나 방관자 같았어요. 형 진석은 자신의 성공만을 좇을 뿐, 막내동생의 아픔에는 관여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해요. 그게 작가와 연출가의 의도이기도 한데, 그 시대 때는 장남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잖아요. 장남을 꼭 대학에 보내야 하고, 장남에 올인해서 꼭 성공해야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부모님 세대의 생각이었죠. 아버지는 몸도 안 좋은데 맨날 술만 마시고 관리도 안 하고 가족도 안 들여다봐요. 장남으로서는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나라도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컸겠죠. 그래서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공부에만 몰두하면서 소위 명문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듯해요”


─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장남이 가졌던 책임감이 성공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다는 거군요. 어쨌든 박정민 배우는 표준어 구사가 쉽지 않다고 했지요. 박정민 배우가 가진 언어의 묘한 질감, 표준어와 비표준어의 경계에 있는 느낌들이 굉장히 살아났다고 봐요. 오히려 진석이 표준어를 썼다면 좀 더 평면적이었을 것 같은데.

“박완규 배우가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많지만, 극단 5년 선배예요. 제가 리딩하고 연습하면 가끔 혼자서 히죽히죽 웃어요. ‘아니, 형 도대체 왜 웃어’ 그러면 ‘너는 감정에 몰입하면 사투리가 나오고 표준말을 쓰려고 하면 감정이 약화된다’ 그러더라고요. 중간을 좀 찾았으면 좋겠다고요. 제가 그걸 해낼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다 보니까 선배 혼자서 막 웃는 거예요. 20대 때 대학 다니면서 연기 생활할 때 선배들한테 되게 많이 혼났습니다. 너는 표준말도 못 쓰는 게 무슨 배우를 한다고 대구에서 올라왔냐, 표준말부터 빨리 배워라 등등. 제가 막 밤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말소리를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2010년도 넘어오면서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게 배우들에겐 오히려 하나의 무기가 됐어요.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게 특기가 돼버린 거죠. 그게 사실 매체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극은 매체와 달라서, 무대에서 사투리를 막 써버리면 관객들한테 전달이 잘 안 될 수도 있어요. 너무 사투리를 쓰다 보면, 번역극 같은 거에는 접근할 수가 없죠. 표준어를 어느 정도 70~80퍼센트는 구사해야 연극배우로서 많은 작품을 소화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소에 되도록 표준어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 사투리도 아니고 아주 표준말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느낌이라서 박정민 배우 말투는 장점처럼 느껴져요. 굳이 표준어를 애써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도 표준어를 쓰고 있지만, 말투가 좀 다를 뿐이죠.

“예를 들어 <다방>은 인물의 20대, 40대, 60대 모습이 쭉 이어지는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에요. 근 50년을 두 시간 동안 극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처음에는 저 나름대로 인물의 히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어릴 때 지방에서 자라면서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답습했고, 성인이 돼서 서울로 상경했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걸 표현했고요. 서울에 살면서 말투에 사투리는 줄고, 표준말이 섞인 거죠. 하지만 제가 맡은 역할이 사기꾼 캐릭터거든요. 결국은 서울 사람인 척하면서,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표준말을 쓰면서 관객들한테 화술 적인 테크닉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투리로 계속 연기하다가 표준말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사실 그게 제 숙제입니다. 앞으로는 사투리와 표준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연습을 할 겁니다”


─ 박정민 배우만의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할 때, 앙상블이 깨지거나 균형이 맞지 않을 때도 있지요.

“맞아요. 그런 밸런스를 조절하는 게 연출가의 몫이잖아요. <다방>에서 제가 사투리로 연기를 하겠다고 했더니 연출님이 표준말보다 본인의 억양으로 연기하는 게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송강호 선배님처럼 제 언어를 구축시키기 위해, 한 4년간 노력해왔는데요. 그전을 돌이켜보면, 애써 표준말을 쓰려고 했던 게 오히려 마이너스였던 적이 많았어요. 억양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감정 표현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죠. 제 언어로 제 억양으로 가다 보니까 더 인물의 성격이나 방향성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우리 극단 대표이신 이성열 연출님이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와 <다방>을 보시고 저한테 처음으로 칭찬을 하셨어요. 원래 칭찬을 잘 안 하는 분인데, 극단에 들어온 지 15년 만에 연출님께 칭찬을 들었어요(웃음). 그때 배우로서 희망을 갖게 됐고, 자존감도 올라갔어요”

“이성열 연출님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마치고 극단에 복귀한 후, 공식적으로 만든 첫 작품이 <서교동에서 죽다>예요. 거기 제가 캐스팅된 거죠. 이 작품에는 고영범 작가의 에세이가 들어가 있어요. 작가님 고향은 서울이고 가족 전체가 서울 사람들이거든요. 연출님이 그런데도 저를 캐스팅하셨어요. 전 서울 사람도 아니고 표준말을 잘 구사하지 못해서 이 역할을 고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죠. 아, 이참에 표준말 좀 잘 써봐 그러셔서 벌써 2년째 공연을 하고 있어요. 연출님이 나름 만족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 백수광부에 입단하고 의미 있었던 작품은.

“처음 신입 단원으로 들어와서 <오레스테스>라는 공연에 참여했어요. 그다음 의미 있었던 작품으로 하동기 연출가와 함께 작업했던 <다방>(2021, 작 라오서)을 꼽고 싶어요. 제가 맡은 역할의 비중과 대사가 많아서 캐릭터를 살리기에 좋은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론 재미와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배역이 저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진중하고 무게 있는 역할보단, 관객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캐릭터를 선호해요. 그런데 사실 그런 작품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동안 무거운 역할을 많이 했죠”


─ 그는 보여지는 캐릭터에 비해 무거운 작품의 역할을 많이 한 것을 강조해 보였다. 작품과 역할을 말하면서 표정과 말투가 무거워졌다.

“2018년에는 최치언 극작가이자 연출가의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에서 안기부 부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다가 고문하고, 독재정권에 휘둘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캐릭터였어요. 사실 어떤 배역이든 재밌게 풀어보려는 성격이라, 그 안기부 부장 캐릭터 안에서도 재밌는 포인트를 찾아보려고 애썼죠. 그리고 2015년 <갈매기>에서는 샤므라예프 역할을 맡았습니다. 샤므라예프 비중이나 분량이 배역 중에서 제일 적어요. 전인철 선배가 그 작품을 연출했는데, 저한테 샤므라예프 역을 주시면서 대사를 직접 써보라고 하셨어요. 제 고향이 대구니까 사투리로 이 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요. 번역극을 그런 식으로 해도 되냐고 반문했더니, 러시아에도 사투리를 쓰는 지방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국 버전으로 고친다면 당연히 우리나라 사투리를 쓸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사를 썼는데, 원래 텍스트보다 분량이 한 다섯 배는 늘어났어요. 연출님이 그걸 읽어보더니 이대로 가자고 하셨죠. 공연을 본 관객들이 이렇게 샤므라예프가 보이는 <갈매기>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말씀들을 해주셨어요”


─ 그는 tvN <응답하라 1988>에서는 MBC 기자로 분하면서 개성 있게 연기를 했고 <슬기론 감빵생활>(박 형사), JTBC<꽃들의 전쟁>(강문두), MBC<계백> (김흥순) 등 다양한 드라마, 영화에서 역할에 비해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큰 비중을 가지고 참여한 작품이 많지는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 <경찰청 사람들>이나 <옥이 이모>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었어요. 본격적으론 2008년 <바람의 화원>이라는 SBS 드라마를 통해 강유언이라는 역할로 데뷔했고요. 강유언은 아주 악랄한 캐릭터죠. 본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유작을 불태우고 팔아먹어요. 피디님은 제가 악역처럼 보이지 않아서 캐스팅했다고 하셨지만, 악역 연기를 하긴 했죠. 드라마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저한테 대본을 한 일곱 개 주시더라고요. 피디님이 제 고향을 보곤 사극 대본을 사투리로 읽어봐라, 또 현대물 대사를 사투리로 해보라고 시키셨어요. 그렇다고 사투리로 강유언을 연기한 건 아니었지만, 그분이 제가 가진 것들을 끌어내 보려고 그런 주문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다음 JTBC 드라마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강빈 마마의 동생 강문두 역할로 30회 정도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웨이브 드라마 <트레이서>에 나왔어요. 연극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단역 제의는 피하기도합니다”


─ 연극과 드라마 영화 활동 중 어느 장르가 편한가.

“물론 연극배우 출신이니까 당연히 무대에는 계속 남아있어야겠죠.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하는 이유는 연극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속된 말로 연극만 해서는 어려우니까 매체 활동도 하는 겁니다. 다시 연극 현장으로 돌아와서 계속 연극인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강하죠.”


| 극단 백수광부 이야기

─ 그는 다시 시계를 올려다봤다. 기차 예약 시간 한 시간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고. 인터뷰를 끝내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시계를 한 번 더 봤다. “극단 백수광부를 선택한 이야기를 좀 해주죠” 물 한잔을 마신 뒤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사실 백수광부라는 극단을 잘 몰랐습니다. 저는 방송국 피디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로 오게 됐어요. SBS 프로덕션에서 약 3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서 장두이 선생님을 따라다녔어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다가 인터넷에서 백수광부라는 극단이 단원 모집을 하는 걸 보고 지원하게 됐죠. 백수광부가 이렇게 훌륭한 극단인지는 들어와서야 알았습니다(웃음). 이성열 연출님이 저한테 ‘박정민 신입 단원, 축하해. 우리 10년 뒤에 보자’ 이러시더라고요. 배우가 만들어지는 데는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사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거든요. 제가 배우 생활을 한 지 16년 정도 됐는데 지금도 많이 부족한 것 같고 아직 제 입으로 배우라고 얘기하기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백수광부 단원이 70명 정도 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 극단이라는 자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 극단 생활이 초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상경한 상황이었고 방송국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다가 극단에 들어갔잖아요. 가장 큰 문제는 생활을 영위하는 거였어요. 월세도 내야 하고 어머니한테 생활비도 드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 극단에 올인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부 작품들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 선배들이 엄청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죠. 뭐 하러 극단에 들어왔냐, 극단에 들어왔으면 집중을 해야지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박완규 선배가 절 많이 질타했는데(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백수광부라는 극단을 보금자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힘들고 괴로울 때 선배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술 사주고 차비 주고, 20~30대까지 저를 먹여 살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추억이지만, 그때는 선배들의 그런 시선들이 너무 힘들긴 했어요”


─ 16년이나 배우 생활을 했고, 지금도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배우라는 직업은 계속 새로운 인물을 만나야 하잖아요. 그 인물을 구축하기 위해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 정도 연습을 거칩니다. 제가 직간접적으로 습득한 지식으로 배역에 접근하는데, 인물을 만들기 위해선 다양한 표현 능력이 있어야겠죠. 그런데 일전에 다른 배역을 할 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제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기도 해서, 이 인물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다고 확신을 가진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배우로서 아직은 부족하고 부끄럽다고 느낍니다”


─ 백수광부에서 배우 활동뿐만 아니라 기획자나 극단 운영자 역할도 해왔어요. 그러다보니 배우로서의 존재감이나 정체성이 희석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그런 면이 있어요. 물론 이성열 연출님은 제가 가진 기획자로서의 재능을 발견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시키셨던 거예요. 방송국 생활도 했고, 대학 다닐 때 조교 일도 했으니까요. 기획자는 공연을 성사시키고, 사람을 응대하고, 지원서를 쓰는 등 엄청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단원들이 전부 연기와 연출을 하려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극단에 실질적으로 기획자가 필요하긴 합니다. 많은 극단이 기획자를 찾지 못해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거든요. 그런 점을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해보자고 해서 이성열 연출님이 저한테 많은 노하우를 전수해주셨죠. 연출님 스스로 기획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그걸 제가 배우고 따라 하면서 오랫동안 기획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캐스팅에도 제한이 있었죠. 배우 일과 기획 일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는 연기를 더 하고 싶었고 연출님은 제가 기획 일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을 하셔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고요. 연기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외도하기도 했습니다. 30대 초중반엔 매체 쪽으로 눈을 돌려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활동했습니다”


─ 백수광부는 한국 연극계를 지탱해오고 있는 극단 중 하나죠.

“이성열 연출님은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출가 중 한 분이시죠. 그분이 연극에 접근하는 방식,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단원들한테 투영되지 않나 싶어요. 그걸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연출님이 작품을 고르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스태프를 구성할 때 진정성이 느껴지거든요. 워크숍을 진행하고 인큐베이팅 공연을 하고 본공연을 올리기까지의 과정도 정말 체계화 되어 있어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작품을 디테일하고 완성도 있게 만들어 내세요. 물론 평가는 관객이나 평론가의 몫이겠지만, 연극을 대하는 접근 방식에 있어서 분명히 이성열 연출가만이 가진 색깔이 있어요. 그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다 보니까 백수광부만의 독특한 작품들이 나오는 듯해요. 또 백수광부가 아직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극단에 선배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96년도에 대략 10여 명의 단원이 백수광부를 창단했고, 지금까지 26년이 흘렀는데 한 서너 명 빼곤 아직 선배들이 남아 계세요. 정은경, 임태산, 이지하, 홍경수, 이준혁 이런 분들이 창단 멤버거든요. 이분들이 건사하고 있어서 10여 명에서 70명 단원을 보유한 극단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 정도 규모면 작은 극단이 아닌데, 아직도 신입 단원을 선발하고 있잖아요.

“수용이 안 되죠. 일단 A라는 작품을 할 때 출연하지 않았던 배우들이 B 작품에는 출연을 하고, 또 거기 출연하지 않았던 배우들이 C에 출연을 하고, 그런 식으로 로테이션이 이뤄집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배우들 중 3분의 1은 매우 바쁩니다. 외부 작품도 많이 하고 본인들 스케쥴이 많다 보니 70명이라곤 하지만 20~30여 명의 단원이 돌아가면서 새로운 작품에 투입되고 있어요”


| 극단 <산타클로스>로 청소년들한테 연극교육의 ‘산타클로스’가 되다.

그가 운영하는 극단 산타클로스는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극단이다. 학교 폭력을 주제로 한 공연이 전국학교 투어에서 반응이 좋아지자 학교와 관계자들은 극단에 학교교육 주제 공연을 맡기고 있고 올해로 260회 이상을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경상북도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천 명의 음악인들이 출연하는 ‘천인 음악제’ 총연출을 맡으면서 배우로서의 감각과 PD 생활을 하면서 숙성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 극단 산타클로스 대표이기도 한데,

“산타클로스는 2012년 학교폭력이 굉장히 이슈였던 시절에 교육부와 만든 교육 극단이에요. 교육부 연수원에 있는 어느 연구사님이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요. 이유인즉슨 교장·교감 선생님, 장학사분들이 연수를 받으시는데,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 이런 사람들을 초청해 학교 폭력에 대해 강연해도 주무신다는 거예요. 그분들이 살아있는 연수를 받으셨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학교 폭력을 주제로 공연을 만들게 됐습니다. <급하게 결성된 어느 피해자 모임>이라는 연극을 만들어서 한 시간짜리 강연을 하게 된 거죠. 관객 참여 방식으로 진행을 해서, 일진 역할을 하는 배우가 실제로 교장 선생님의 옷이나 지갑, 신발 같은 것들을 빼앗아요. 자신의 것을 빼앗긴 교장 선생님들이 막 연기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생동감이 넘쳤죠. 원래 파일럿으로 두 번만 공연하기로 한 게 지금까지 260회째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교육부에 발을 담그게 됐고, 롤 플레잉과 강의 형식을 가져와서 연수받는 분들이 실제 연기를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국투어도 하고 있어요”


─ 청소년 교육 관련해서 다른 활동은.

“천인음악제라고,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주최한 작품의 총연출을 맡게 됐어요. 학생, 교사, 일반인, 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1,000인의 음악인이 출연하는 행사에요. 교육청이 주최하는 행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인데,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이런 활동이 제가 연극을 하는 데 있어서 바람직한가 하는 딜레마가 있긴 해요. 왜 자꾸 딴짓을 하냐는 얘기들을 듣곤 하는데, 결국은 생계 문제가 걸려있어요. 제 나이가 마흔다섯이고 이제 결혼한 지 4년이 되어가는데, 처자식이 있다 보니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외도 아닌 외도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제는 배우들도 멀티플레이어로 살아야 하지 않나. 배우가 감독을 한다든가, 본인의 역량이 있으면 제작이나 기획도 하는 멀티 플레이요. 그렇게 사는 것도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 톱배우가 되거나 아주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가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경험한 연극반을 시작으로 여태껏 쭉 연기를 해왔습니다. 앞으로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연기를 할 것이고 연출을 할 수 있다면 연출을 할 겁니다. 기획이나 제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것도 열심히 해야겠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일조할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게 제 소망입니다.”

기차 출발 시간 30분을 남겨두고 있었는데도 그는 페이스북을 열고는 쌍둥이 가족사진을 보여주었고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전국을 누벼도 피곤하지 않다며 셀카를 찍자며 여유도 부렸다. “내년에는 좀 더 연극을 하고 싶어요. 배우로서의 입지를 좀 더 구축시키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그 사이사이에 교육 극단 산타클로스 사업을 잘 수행해서, 교육계와 연극인이 공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싶어요” 20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달려 나갔고 저녁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포항에 잘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일이 잘될 것 같아요” 박정민은 언어의 한계를 버리고 배우로 무대에서 살아있으려고 자신의 연습 방법을 습관처럼 해나갔고 나이 마흔이 넘으면서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가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을 한 작품은 성공시켰다. 성품(性品)이 배우를 만든다는 말, 배우 박정민을 떠올리게 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