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쌍림동에 있던 교회를 강남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성전을 지을 땅을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허탕만 쳤다. 34번째로 찾은 땅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이었다. 때는 1978년 1월 1일. 당시만 하더라도 배나무밭이던 그 땅에 엎드려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땅을 거룩한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옮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성도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여러분, 저 들판에 세계에서 제일 크고 위대한 감리교회가 올라갈 것입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입니다.”
이 같은 호언장담은 결국 현실이 됐고, 그는 한국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었다. 이런 스토리의 주인공은 지난 25일, 92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긴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다.
‘5분의 기적’에서 시작된 신앙의 여정
김 목사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26일 광림교회에서 열린 입관 예배에서 감리교신학대 교수를 지낸 서창원 목사가 전한 설교를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 서 교수는 김 목사를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영국 런던 웨슬리채플에 김 목사님의 흉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감리교는 잘 알지 못하지만 김 목사님의 이름과 광림교회의 존재는 모두가 압니다. 김 목사님은 우리의 스승으로, 감리교의 지도자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서 목사의 말마따나 고인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선명한 무늬를 남긴 목회자다. 김 목사가 생전에 “인생의 기점”이 됐다고 말하는 시기는 한국전쟁 때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의학도의 길을 걷던 김 목사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군의관으로 끌려갔다. 그는 호시탐탐 월남할 기회를 노렸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는 대열에서 이탈해 국군을 만나게 됐다. 포로가 될 줄 알았지만 국군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당신이 필요하오. 다친 군인이 많으니 도와주시오.”
불과 5분 만에 기적처럼 이뤄진 신분의 전환이었다. 김 목사는 과거 국민일보에 실린 연재물 ‘역경의 열매’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적었다. “인생의 기점이 어디냐는 질문 앞에 나는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5분 만에 변화시킨 하나님을 체험한 그때 그 순간이라고. 그리고 그 기적을 이루어낸 힘의 원천은 기도라고. …이 체험은 나의 일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54년 김 목사는 감신대에 입학했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공군 군목으로 일했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71년 광림교회 제5대 담임목사에 부임했다. 당시 이 교회는 성도가 150명 정도에 불과한 중형 교회였다. 하지만 김 목사가 부임한 뒤부터 성도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지금은 일반화된 ‘총동원 주일’을 만든 주인공도 김 목사다. 광림교회는 78년 지금의 위치로 교회를 이전했다. 교회는 강남을 대표적 대형교회로 성장했고, 현재는 등록 교인이 10만명에 달하는 한국 감리교회의 상징이 됐다.
기감, “국민훈장 무궁화장 서훈 청원”
김 목사의 사역은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86년 광림복지재단을 설립해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었고 해외 각국에 선교 센터도 지었다. 문화 선교를 위해 교회 옆 사회선교관에 공연장(BBCH홀)을 짓기도 했다.
교계 리더로서도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감독회장을 지냈으며,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과 한국월드비전 이사장을 역임했다. 기감은 지난 25일 정부에 1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김 목사에게 줄 것을 청원했다. 기감은 “(김 목사는) 대한민국 발전과 국민정신 함양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무궁화장을 받은 목회자나 신학자로는 고(故) 조용기·강원룡 목사, 고(故) 이태영 박사 등이 있다.
김 목사는 자신을 포함해 4형제가 모두 목회자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故) 김홍도(금란교회) 목사와 김국도(임마누엘교회) 김건도(21세기교회) 목사가 그의 동생이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박관순 사모와 장남인 김정석 광림교회 담임목사, 차남인 김정운 권사와 장녀 김정신 권사가 있다.
김정석 목사는 27일 예배에서 담담한 어조로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던 아버지를 추억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을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감독님은 평생 ‘복음에 빚진 자’로 사셨다. 그러면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 교회가 어떻게 매력적인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거룩함으로 구별이 되는 삶을 사시려고 했다.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향해 항상 달려가셨다. 감독님은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꿈꾸는 삶이었다. 감독님에겐 인내와 의지와 결단력이 있었다.”
김 목사의 장례는 기독교대한감리회장으로 진행되고 있다. 빈소는 광림교회에 마련됐으며, 장례 예배는 28일 오전 9시30분 광림교회 대예배실에서 열린다. 장지는 경기도 광주 광림수도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