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카타르월드컵 첫 경기에서 완패한 이란 축구대표팀을 두고 자국 내 반정부 시위 여파가 경기장까지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반정부 시위에 적극적인 연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표팀에 부정적인 일부 여론이 형성되는 등 경기장 곳곳에서 경기 외적인 반응들이 감지됐다.
이란은 21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B조 1차전에서 잉글랜드에 2대 6으로 완패했다. 이란이 예상대로 5-4-1의 수비 지향적인 포메이션을 들고나오면서 이들의 강력한 수비에 잉글랜드가 고전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란은 전반전에만 3골을 허용하며 도합 6골을 실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란의 전술은 수비 중심의 ‘늪 축구’ ‘질식 축구’로 대표된다.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도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 강호를 고전시킬 정도로 막강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 10경기를 치르면서 허용한 실점은 4골에 불과했다. 이란으로선 잉글랜드전 완패는 ‘수비 명가’로서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졸전이었다.
주요 외신들은 이란의 졸전 이유 중 하나로 자국 반정부 시위로 인한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짚었다. 혼잡한 국내 상황이 대표팀 선수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줘 경기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일부 선수가 반정부 시위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가 대표팀 선발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 서방 국가에서는 이란 내 인권 상황이나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이란을 월드컵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란의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는 지난 9월 20일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됐다가 풀려난 뒤 사흘 뒤 의문사했다.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는 두 달 이상 이어지고 있다.
이란 대표팀은 반정부 시위에 연대한다는 뜻으로 이날 잉글랜드 전에서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AFP통신은 “이란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국가 연주가 시작되자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TV 중계 카메라는 관중석 내 머리를 스카프로 가린 여성이 울먹이는 모습을 비췄다”고 전했다. 이 순간 이란 국영 TV는 선수들 얼굴을 비추는 대신 경기장 전경으로 화면을 돌렸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이란 응원단이 자리한 곳에는 ‘Women Life Freedom(여성, 삶, 자유)’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자유’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아자디’라는 구호도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란 테헤란에서 온 34세 여성 아프사니는 AP통신에 “내가 엄청난 축구팬이지만 실제 경기장에서 관전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경기장에 들어올 때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다. 이란에서는 여성의 축구 경기장 입장이 자유롭지 않다. AP통신은 “아프사니는 이란 정부를 의식해 자신의 성(姓)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사망한 아미니의 나이 22세에 맞춰 잉글랜드전 전반 22분에는 일부 팬이 아미니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란 선수들도 두 골을 득점했지만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서로를 다독일 뿐 골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AP통신은 이란 선수들에게 실망의 뜻을 전한 여성 축구팬들의 발언도 전했다. 35세 여성 마이람은 “선수들이 더 명확한 연대 의사를 밝히지 않아 실망”이라고 AP통신에 말했다. 이란 마잔다란주에 사는 언어학 교수 캄란은 “반정부 시위가 축구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나도 이번 대회에서는 이란이 3패를 당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이 매체는 “대표팀을 응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이란 내 여론이 갈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란 국민 다수가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이 (정부를 응원하는 것으로 간주해) 길에서 목숨을 잃은 이란 젊은이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알리 자심이라는 14세 이란 팬은 잉글랜드전 전반이 0-3으로 뒤졌을 당시 AP통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란 대표팀의 실패를 원하는데 선수들이 어떻게 경기에 집중하겠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실제로 이란 응원단석에서는 종종 야유가 터져 나왔다.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국내 정치적 상황으로 대표팀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우리 팀을 응원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냥 집에 있어라. 왜 여기까지 와서 우리에게 야유하느냐. 우리는 그런 팬들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수들이 지금 처한 상황은 최상이 아니다. 경기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며 “사람이니 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로스 감독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어나서 계속 싸운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이들은 그저 나라를 대표해 축구를 하려는 선수들일 뿐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뛰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라며 “제발 이들이 경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란은 오는 25일 저녁 7시 웨일스와 조별리그 2차전을 치른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