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봉제거리’다. 좁고 가파른 골목 옆으로 늘어선 건물에는 ‘패턴’ ‘재단’ 같은 안내판이 달려 있고, 열린 문틈으로는 바쁘게 움직이는 재봉틀이 보인다. 창신동은 동대문패션타운의 배후 생산기지로서 1970~90년대 가내수공업 형태의 봉제공장이 밀집돼 있다. 한창때는 3000곳이 넘었던 봉제공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값싼 중국산이 들어오면서 점점 쇠퇴해 지금은 1000곳이 조금 안 된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창신동에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다양한 문화예술 플랫폼들이 생긴 것도 그중 하나의 현상이다. 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대표 신현길)가 지난해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뭐든지 아트하우스’는 대표적이다. 아트브릿지가 10년간 창신동에서 예술교육 등 지역 문화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설립한 뭐든지 아트하우스에는 30석 규모의 소극장 ‘뭐든지소극장’도 포함돼 있다.
지난 18~20일 뭐든지소극장에서는 ‘아침이슬’ ‘상록수’의 작사·작곡가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의 전설적인 공연이 올라갔다. 바로 1978년 한국 최초로 노동자 문제를 다룬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혹독한 작업 환경에 놓인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들에 의해 좌절되지만, 다시 희망을 품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무료로 열린 이번 공연은 ‘창신, 공장의 불빛’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창신동에서 공연되는 것 외에도 창신동에 사는 연출가와 지역 활동에 진심인 창신동 청년들, 봉제공장에서 40년 넘게 일해온 봉제사 그리고 대학로 배우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배우들이 포함된 데다 음악은 신디사이저 위주로 기타와 피리가 잠깐 사용된 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순 없지만, 공연의 진정성과 에너지만큼은 여느 프로 무대 못지않았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1970년대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불리며 봉제사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사수 농성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 3명이 보러오기도 했다.
‘공장의 불빛’은 김민기가 1977년 군에서 제대한 후 1년여간 봉제공장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들과 1970년대 처절했던 동일방직 노조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노래들은 구전 가요와 가스펠 등을 활용한 노래들은 따라부르기 쉬우면서도 드라마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요주의 인물이었던 김민기는 1978년 말 ‘공장의 불빛’ 노래들을 만든 뒤 한국도시산업선교협의회의 도움으로 몰래 녹음했다. 당시 가수 송창식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반주에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에 모인 청년들의 노래를 덧입힌 카세트테이프 2000여 개가 전국 노조, 대학, 종교단체 등에 배포됐다. 테이프는 앞면에 노래를, 뒷면엔 반주를 실어 현장에서 실연할 수 있도록 했다.
‘공장의 불빛’이 처음 공연된 것은 1979년 2월 제일교회에서다. 탈춤 등 민족문화 운동을 하던 채희완(부산대 명예교수)의 연출로 공연됐는데, 당시 출연진이 노동자였는지 대학생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현재 유튜브에는 이 공연을 위해 연습하던 1978년 말의 흑백 영상이 남아 있다. 영상의 질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지만, 당시 공연 참가자들의 열기가 느껴진다.
‘공장의 불빛’은 첫 녹음테이프의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대학가와 노동현장으로 퍼져나갔다. 1980년대 엄혹한 당시 시국 때문에 ‘공장의 불빛’이 얼마나 공연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몇 차례 암암리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복제 테이프와 노래 구전을 통해 전해지던 ‘공장의 불빛’은 지난 2004년 CD와 DVD로 리마스터된 정식 음반이 만들어졌다. 김민기는 주변의 추천으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던 22살의 정재일에게 편곡을 맡긴 바 있다.
이번 ‘창신, 공장의 불빛’은 ‘공장의 불빛’이 공연장에서 정식으로 올려진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한 신현길 아트브릿지 대표는 “창신동에서 살고 있는 연출가 박정근 씨,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40년 이상 봉제사로 일해왔으면 지역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인 김선숙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민기 선생님의 ‘공장의 불빛’을 올리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면서 “솔직히 김민기 선생님께서 공연을 허락해주실지 걱정이었다. 그런데, 봉제거리 창신동에서 지역 주민과 함께 올린다고 말씀드리자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저작권료도 사실상 받지 않으셨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은 겨우 5회 진행되는 바람에 150명밖에 보지 못했다. 관객이 몰릴까 봐 홍보를 자제해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이나 미처 관람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재공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신현길 대표는 “재공연 여부는 김민기 선생님의 저작권 허락을 다시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즉답하기 어렵다”면서도 “‘공장의 불빛’이 음반만이 아니라 작품의 원래 취지에 맞게 공연되면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