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 예산’ 논란에 휩싸였던 내년도 공공형 노인 일자리 예산이 올해 수준으로 복구될 가능성이 커졌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약 10%(6만1000개) 줄이는 내용의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돌연 생각을 바꿨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정책질의 첫날 “국회 심사 과정에서 공공형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이를 공식화했다.
정권 출범 초부터 노인 일자리 ‘체질 개선’을 강조했던 기재부가 공공형 노인 일자리 확대 의사를 밝힌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윤석열정부는 노인 일자리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공공형 일자리를 줄이는 대신, 민간·사회서비스형 일자리 비중을 높이겠다는 점을 줄곧 강조해왔다.
공공형 노인 일자리 90%가 70대 이상 노인에 집중된 만큼 현실적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점, 세제·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갈등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여야가 드물게 동의하는 사안이라는 점, 내년 경기 둔화·고용 한파 전망 속 노인 일자리를 포함한 직접 일자리가 취업자 수 증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결과다.
‘체질 개선’ 속도 조절 들어간 정부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노인 일자리는 크게 공공·민간·사회서비스형 일자리로 구분된다. 공공형은 쓰레기 줍기, 잡초 뽑기 등 단순 업무가 주를 이루며 월 30시간 근로를 수행하면 정부가 27만원을 직접 지급한다. 경쟁력 있는 고숙련·고학력 노인들이 주 대상인 민간형(월평균 119만원 수준), 경력을 고려한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서비스형(월 60시간, 71만원)도 있다.20일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노인 일자리는 82만2000개로 올해(84만5000개)보다 2만3000개 줄어든다. 다만 정부는 고용노동부가 지원하는 고령자 고용장려금 일자리까지 고려하면 2만9000개가 늘어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총 예산도 올해 1조4584억에서 내년 1조5304억원으로 증가한다.
윤석열정부 노인 일자리 정책은 민간·사회서비스형을 중심으로 ‘확대 재편’하겠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노인 일자리 중 공공형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기준 약 72.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컸는데, 다른 두 비중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정부안에는 공공형을 줄이는 대신 민간형과 사회서비스형을 각각 2만3000개(16만7000개→19만개), 1만5000개(7만개→8만5000개) 늘리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정부는 고심 끝에 해당 기조를 수정했다. 여기에는 정부가 내부적으로 실시한 각 일자리 유형별 연령 비중 조사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공공형의 89.0%는 70대 이상이 수혜 대상이다. 민간형(33.7%), 사회서비스형(56.5%)의 70대 이상 비중과 매우 차이가 크다.
그동안 공공형 노인 일자리는 ‘일자리’ 측면보다 ‘복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애초에 공공형은 2004년 일자리와 노인 빈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처음 도입됐던 사업이다. 도입 첫해에는 참가자의 90%가 70살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90%가 70살 이상이다.
한국의 고령 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노인 빈곤 문제는 좀처럼 나아지고 있지 않다. 2020년 기준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40.4%로 경제협력기구(OECD) 평균(13.1%, 2018년 기준)의 3배가 넘는다. 한국의 노인자살률(인구 10만명당 46.6명)도 OECD 국가(평균 17.2명) 중에서도 압도적 1위다.
정치권 눈치·경기 둔화 전망도 한몫
공공형 노인 일자리 확대는 여야가 한목소리로 동의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일찍이 ‘패륜 예산’이라며 1순위로 공공형 노인 일자리 예산 복구를 주장해왔고, 노인 표를 신경 안 쓸 수 없는 국민의힘도 이에 협조적인 편이다. 세제개편안·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갈등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이례적 광경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노인 일자리 관련 예산을 1611억원 증액했다. 추 부총리가 예산안 국회 심사 초기 ‘공공형 노인 일자리 확대’ 카드를 꺼낸 것에도 정무적인 판단이 깔려있었던 셈이다.내년 상반기 경기 둔화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고용지표는 경기에 후행하는 특징이 있다. 경기부진이 내년 고용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기재부는 이달 초 고용동향 분석 보고서에서 “내년에는 기저효과, 경기 불확실성 확대, 직접 일자리 정상화, 인구 영향 등에 따른 (취업자 수) 증가 폭 둔화가 확대될 전망”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일자리를 늘려 취업자 수 감소분을 일부 상쇄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정부 관계자는 “문재인정부에서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포함한 직접 일자리가 취업자 수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물론 노인 일자리 덕에 전체 일자리가 늘어난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안 되지만, 경기 하강 대응 측면에서 어느정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기재부는 장기적으로 민간·사회서비스형 일자리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기조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현재 공공형 일자리 대상자 중 60대는 충분히 민간·사회서비스형으로 이동 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며 “근로 능력이 취약한 초고령자는 공공형에 남아 있되, 다른 이들은 더 넉넉한 급여를 제공하는 민간 일자리로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