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좌절을 겪는 청소년

입력 2022-11-17 10:13

중학교 3학년 P는 과학고 입시에서 낙방한 후 무기력에 빠져 외출도 안 하고 집에서 게임만 하고 지낸다. P처럼 좌절을 경험한 후에 청소년들은 ‘나는 멍청이야. 쓰레기야’처럼 극단적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그 생각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자신이 명명한 생각과 거리를 둘 수 있게 생각에 대한 관찰자 시점을 찾아 주는 게 필요하다. 일명 ‘타임랩스(저속) 카메라기법’이다.

P: 과학고에 떨어졌으니 전 완전 바보예요. 인생에 실패한 거죠. 초등학교부터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된 걸 보면 저는 머리가 너무 나쁜 거 같아요. 전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때워요. 친구들도 저를 비웃을 거 같고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아요.

상담자: 입시 발표가 난 후에 자신을 실패자나 바보처럼 보고 있군요. 입시 전에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P: 그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렸어요.

상담자: 그럼 예전에는 당신 자신을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했고, 지금은 자신을 바보라고 여기며 자부심을 잃어버렸네요. 만약 일반 고등학교에 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때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요.

P: 그럴 리가 없어요. 일반 고등학교에서 원하는 대학을 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이고. 나는 공부할 의욕이 없어요. 그냥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게임중독이나 되겠죠.

상담자: 그럼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있는 거네요. 미래로 가보면 게임중독으로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 같단 거죠. 그러면 당신 자신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견해를 볼 수 있네요. 열심히 공부하는 똑똑한 나, 머리 나쁘고 바보인 나 그리고 게임중독인 나. 자기 자신에 대한 매우 다른 견해가 있는 거로군요.

P: 그렇죠.

상담자: 자신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알아차리는 건 자신의 어떤 부분인가요.

P: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상담자: 자신을 열심히 공부하는 똑똑한 사람으로 알아차리는 자신의 일부가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바보라고 알아차리는 자신의 일부도 있고요. 고등학교 가서 자신을 게임중독이라고 알아차릴 자신의 일부도요. 1분 동안 자신에 대한 이러한 다른 견해들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고 상상해 보죠. 그러면 누가 이 영화를 보고 알아차리는 걸까요.

P: 관객이죠.

상담자: 자신에 대한 P의 견해들에는 시간에 따른 신기한 변화가 있는 것 같네요. 예를 들면 당신이 고등학교 입학 후에 느낄 자신에 대한 견해 vs 자신에 대해 지금 느끼는 견해 vs 중학교 시절 자신에 대해 느꼈던 견해처럼요.

P: 알겠어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 것 같아요. 저 자신에 대한 제 태도는 그때그때 변해왔네요. 어느 정도는 여전히 항상 저인 거죠.

상담자: P가 고등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좋은 대학에 간다면 자신에 대한 견해는 다시 변할 가능성이 큰 것 같고요. 자신에 대한 견해는 시간마다 다르게 존재하는데 이걸 알아차리는 ‘자신’도 있네요. 마치 영화의 장면은 다양하게 변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늘 존재하는 것처럼요.

좌절을 겪고 무력감에 빠진 P에게 주변 사람들이 그의 좌절감을 인정하고 공감해 주면서도 ‘나는 바보예요’라는 생각은 자신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하나일 뿐이며 이런 견해를 관찰하는 주체인 자신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원하는 삶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