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이 “‘박 전 시장이 성희롱을 했다’고 판단한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행정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번 소송은 형식적으로는 인권위가 권고 과정에서 이미 망인이 된 사람의 범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를 두고 진행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박 전 시장의 명예회복 여부로 관심을 끌어 왔다. 법원은 성희롱 여부에 대한 실체적 판단으로 나아갔고, 피해자의 성희롱 피해를 사실로 인정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재판장 이정희)는 15일 박 전 시장의 배우자 강난희씨가 제기한 인권위 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강씨 등 유족은 박 전 시장의 범죄 수사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인권위가 피해자 주장만 듣고 고인을 함부로 범죄자 낙인찍었다며 지난해 4월 소송을 제기했었다.
법원은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신빙성이 높은 사실로 인정했다. 이에 기초해 피해자 구제 및 제도 개선을 권고한 인권위 결정도 타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처럼 성희롱 가해자가 사망한 경우 반론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측면이 있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보낸 부적절한 문자 메시지와 본인의 사진 등을 피해자에게 성적인 굴욕감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 외에도 이 사건 참고인들의 진술은 시간, 장소, 상황 등을 상세히 밝히고 있어 경험하지 않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구체성이 있다”고 밝혔다. 허위 진술할 동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유족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박 전 시장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인품이 훌륭해 배울 점이 많다’고 하는 등 친밀감을 표하고 수년간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희롱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 전 시장은 피해자의 신분상 지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피해자로서는 성희롱 피해를 공론화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직무상 불이익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며 “성희롱 피해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감내하며 직장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 행정소송 과정에선 ‘2차 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강씨의 대리인이었던 정철승 변호사는 지난달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보낸 ‘사랑해요’, ‘꿈에서는 돼요’ 등 텔레그램 메시지를 공개했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보낸 건 사실이나 남녀 사이 감정이 아닌 피해자의 일터에서 동료들과 상·하 직원 사이에 존경의 의미로 관용적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박 전 시장의 성적 언동을 회피하고 그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말로 해석될 여지도 많다”고 했다.
법원은 지난해 1월에도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간접적으로나마 사실로 인정한 바 있다. 박 전 시장 사건과 별개로 만취한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옛 서울시 직원 정모씨 판결문에 재판부는 “피해자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자신이 아닌 박 전 시장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법원으로서도 불가피하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대법원은 그해 7월 정씨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