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재난 보도, 어떻게 할까요

입력 2022-11-09 00:02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가 7일 프레스센터에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말 그런 장면은 처음 봤어요. 구급차 수십 대가 들어오고, 환자들이 실려 나오는데 죽은 사람들이 엄청 많은 거예요. 환자들이 쏟아지고, 의사·간호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다들 소리 지르고…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어요. 취재하긴 했는데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꾸 졸려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갑자기 눈물이 나요. 정말 괜찮았는데…”

지난달 29일 일어난 이태원 참사 당시 모 병원 응급실을 현장 취재한 기자가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위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털어놓은 내용이다. 사건·사고·재난의 당사자가 아니어도 간접경험을 통해 트라우마 반응을 겪는 현상을 ‘2차 트라우마’라고 한다. 의료진과 소방관 등 현장 인력뿐만 아니라 당시 참사 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한 언론인들도 2차 트라우마의 대상이 된다.

이태원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가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는 가운데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가 7일 모두의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2021년 11월부터 약 1년간 언론인‧학자‧정신건강 전문의 등 전문가집단 10여 명이 참여한 자문회의를 거쳐 마련했다. 재난 당사자의 심리적 상황과 어려움을 배려해 취재하고 재난 회복을 위해 사회 전체가 함께한다는 지지를 보여줌으로써 재난 극복과 사회 통합까지 염두에 둔 보도를 지향한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7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한 발표회에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의 세부 지침을 공개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가 7일 프레스센터에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이드라인은 준비‧취재‧보도 단계로 나뉜다. 언론인이 재난 당사자를 인터뷰할 때 될 수 있으면 대책본부나 재난 당사자 대표를 통해 접촉하고, 이들의 신체와 심리 상태를 우선 확인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당사자가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몸을 떠는 등 통제하기 어려운 신체적 반응을 보인다면 취재하기 적절한 상황이 아니다. 가이드라인은 언론인이 재난 당사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으면 사건에 대한 반복 질문도 피할 것을 당부했다.

가이드라인은 아울러 당사자의 신상이나 사생활 노출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이 오열하거나 극도로 흥분한 상황을 여과 없이 보도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특히 재난 당사자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는 보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했다.

이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소개해 사회 통합과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하라고 보도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재난 당사자를 능동적 주체로 조명하고, 재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긍정과 낙관적 요소를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취지다.

가이드라인 세부 지침에는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 언론사와 기자 개인이 따라야 할 권고 사항도 포함됐다. 언론사는 재난 보도의 전문성을 높이는 교육·훈련 과정을 마련하고 안전 장비를 충분하게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장 기자에게 충분한 취재 자율성을 부여해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재난 현장에는 한 명을 장기간 파견하기보다는 교대 근무로 스트레스의 위험을 낮추라고 지침은 권했다. 또 기자가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하고, 온라인상의 괴롭힘에 대해서는 법률적 행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원장은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재난 보도는 당사자와 가족, 일반 국민, 언론인의 안전이 확보될 때 이뤄질 수 있다”며 “트라우마 예방 재난 보도는 언론인 개인의 역할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언론사의 인식 변화와 제도적 지원, 사회적 합의를 위한 조율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언론진흥재단

이날 ‘트라우마와 공감 언론’을 주제로 발표한 정찬승 위원장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언론과 트라우마를 공감하는 언론의 차이를 설명하며 “트라우마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언론이 언론인은 물론 취재원과 시민 모두에게 이롭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언론인이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알아야 취재원과 효과적으로 소통하여 더 나은 취재를 할 수 있고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다”며 “언론사(뉴스룸)는 언론인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지원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