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자정쯤 유흥업소가 밀집한 광주 치평동의 한 도로.
오토바이와 화물차를 잇따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낸 40대 남성 A씨가 어디론가 차를 몰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번잡한 도로에서 1㎞ 가까이 도피행각을 벌인 A씨는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에 붙들려 뒤쫓아온 경찰에 넘겨졌다.
불과 2~3분 전 경찰의 음주단속을 거부한 채 현장을 벗어나던 A씨는 교통사고를 낸 뒤 달아난 혐의(도주치상)로 현장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
A씨가 음주단속을 피해 꼬리를 감추는 과정에서 촉발한 사고로 오토바이 운전자 다리가 부러졌다. 경찰은 A씨의 음주 여부를 가리기 위해 채취혈액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사고를 낸 뒤 한동안 잠적하는 ‘양심불량’ 운전자들이 늘고 있다.
술이 깨는 시간을 벌기 위해 연락을 한때 두절했다가 경찰에 뒤늦게 출석해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하거나 “당황해서 그랬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다.
경찰은 음주사고 정황이 뚜렷한데도 음주측정이 사실상 불가능해 속수무책이다.
음주뿐 아니라 무면허 운전 등 각종 범죄를 숨기기 위해 사고 직후 차를 팽개치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아 관련법을 개정하고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27일 광주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낸 이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차를 버려둔 채 현장을 무단 이탈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경찰은 도주 운전자가 하루 이틀 동안 연락을 끊고 있다가 출석할 경우 정황상 음주운전이 의심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 확보’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혈중알코올농도를 역추산하는 위드마크 기법이 활용되고 있으나 장시간 행적을 감추게 되면 최초 농도 수치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1일 정오쯤 광주 상무지구 서부교육지원청 앞 도로에서 외제차를 몰다가 인도로 돌진해 철제 울타리와 화단을 부순 30대 남성 B씨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를 그대로 버리고 갔다가 다음 날 밤 10시에야 나타난 B씨는 34시간 만에 자진 출석한 경찰에서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휴대전화를 끈 채 사고 당일 귀가도 하지 않았던 B씨의 음주운전을 규명하기 위해 위드마크 기법을 동원했으나 한계 수치 이하밖에 검출되지 않아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정황상 음주운전이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광주에서는 앞서 지난 7월에도 유사한 뺑소니 사고가 발생했다. 30대 남성이 치평동 교차로에서 앞서가던 차량을 들이받는 추돌사고를 낸 뒤 달아났다가 30여시간만에 경찰에 출석한 것이다.
그는 “겁이 나서 그랬다”고 둘러댔지만, 경찰의 사고처리 과정에서 수개월 전 음주사고를 내 재판 중인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피해차량 운전자로부터 “상대 차량 동승자에게 술 냄새가 났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지인 등을 상대로 도주 경위에 대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경찰이 음주운전 사고 직후 달아난 용의자를 신속히 체포하거나 관련 음주사실을 입증하려면 통신·카드결제 명세내역 등에 대한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적 절차를 밟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데다 이마저 긴급상황이 아니면 발부가 어려운 현실이다.
현행 도로교통법 제54조는 ‘주행 중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는 경찰관에 신고하고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런데도 이보다 음주운전 사고를 한층 가중 처벌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적용을 피하기 위해 얌체 운전자들이 음주사고 현장에서 달아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경찰 관계자는 “술을 마신 채 운전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일단 차를 버리고 무조건 달아나는 게 상책이라는 인식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