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 원로연출가 김우옥, 22년 만에 실험극으로 복귀

입력 2022-10-27 05:30
원로연출가 김우옥이 지난 21일부터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구조주의 연극의 대표작인 ‘겹괴기담’을 선보이고 있다. 김우옥의 연극 연출은 지난 2000년 이후 22년 만이다. 권현구 기자

1960~70년대 미국 뉴욕은 실험 연극이 왕성하게 펼쳐지던 곳이었다. 당시 뉴욕대 교수 마이클 커비(1931~1997)는 스토리 대신 구조를 통해 연극의 본질과 기능을 강조하는 ‘구조주의 연극’을 주창했다. 커비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초대 원장을 지낸 연출가 김우옥(88)이다.

김우옥은 대학 졸업 후 영어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의 연극반을 지도하다가 본격적으로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1964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커비는 김우옥이 뉴욕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당시 지도교수였다. 김우옥은 커비의 작품에 직접 배우로도 출연하는 등 커비를 통해 실험 연극에 깊이 빠졌다.

1980년 귀국해 서울예대에서 교편을 잡은 김우옥은 드라마센터 전속극단인 동랑레퍼터리극단에서 커비의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 ‘내. 물. 빛’, 1981년 ‘혁명의 춤’, 1982년 ‘겹괴기담’ 등 세 편을 잇달아 연출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연극계의 타성을 깨는 새로운 미학에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연출가의 지적 집착이라는 차가운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연극계의 현실을 실감한 김우옥은 구조주의 연극에 대한 꿈을 접고 청소년연극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가 1985년 창단한 국내 최초 청소년연극 전문단체인 동랑청소년극단은 1990년대 초까지 ‘방황하는 별들’ ‘꿈꾸는 별들’ ‘이름없는 별들’ ‘외로운 별들’ ‘불타는 별들’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끌었다.

김우옥은 2000년 한예종 연극원을 정년퇴직하며 다시 한번 커비의 작품을 올렸다. 오랫동안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다만 ‘혁명의 춤’과 ‘겹괴기담’은 1980년대 초반보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연극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머물렀다.

‘구조주의 연극’ 마이클 커비의 대표작을 세 번째 연출

원로연출가 김우옥이 연출한 마이클 커비의 ‘겹괴기담’의 한 장면. 2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 공연되는 것이 특징이다. (c)오스토리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 연출가 김우옥이 22년 만에 커비의 작품을 다시 올렸다. 바로 올해 7회째인 늘푸른연극제의 개막작으로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겹괴기담’(~11월 6일)이다. 2006년 서울아동청소년공연예술축제(아시테지 코리아) 예술감독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우옥이 16년 만에 복귀한 것이어서 공연계의 관심이 높다.

“대학로의 서울문화재단 쿼드 극장을 개관(7월) 전에 볼 기회가 있었어요. 잘 지어진 블랙박스 극장이더군요. 요즘 서울에도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블랙박스 극장이 여러 개 등장한 만큼 ‘겹괴기담’을 다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어요. 그런데, 얼마 뒤에 늘푸른연극제에서 공연을 올리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또 다른 블랙박스 극장인 더줌아트센터에서 ‘겹괴기담’을 올리게 됐습니다.”

연극 전문지 ‘더 드라마 리뷰’(TDR) 편집장을 15년 역임하는 등 뉴욕 실험 연극계의 거물이던 커비는 김우옥을 통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됐다. 1996년 3월부터 1년간 연극원 초빙교수로 재직한 커비가 김우옥을 위해 쓴 ‘내. 물. 빛’은 한국 연극사상 최초의 구조주의 연극으로 기록됐다. 또한 커비는 미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골수염으로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연극자료를 한예종에 기증하기도 했다.

‘겹괴기담’은 스토리 대신 연극의 구조와 기능에 중점

구조주의 연극을 주창한 마이클 커비 뉴욕대 교수는 원로연출가 김우옥에게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커비는 김우옥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원장 시절 한국에 초청돼 강의를 하기도 했다. 사진은 뒷편의 병풍이나 인삼주 등을 볼 때 커비가 생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마이클 커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스북

공연 개막을 앞두고 만난 김우옥은 ““커비 선생님과는 원래 사제 관계지만 점차 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 예술적으로 내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친 분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회고하면서 “커비 선생님의 대표작인 ‘겹괴기담’의 실험성이 초연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지 보고 싶다. 특히 실험극 전통이 약한 한국에서 너무 빨리 소개되는 바람에 초연 당시 냉담한 반응을 얻었었는데, 이제는 한국도 문화적으로 다양해진 만큼 색다른 형태의 공연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1978년 뉴욕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겹괴기담’은 두 개의 무서운 공포담을 정밀하게 겹쳐 놓은 작품이다. 즉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상황이 겉으로는 같지 않지만, 결국 같은 사건들이 같은 순서로 일어난다. 무대 위에 놓인 6m×6m의 커다란 상자는 커비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 6개의 망사 막이 드리워져 있으며, 각각 1.2m 간격의 다섯 개 공간으로 나뉜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면 두 이야기는 양쪽 끝 공간에서 각각 시작돼 장면이 바뀔 때마다 옆 공간으로 이동하며 가운데에서 교차한다. 관객은 반으로 나뉘어 상자 양쪽에서 관람하는데, 가까이 보이던 이야기가 점점 멀어지는 반면 멀리 보이던 이야기는 점점 가까워진다. 서사를 따라가는 전통적인 연극과 달리 ‘겹괴기담’의 관객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두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새로운 관극 체험을 하게 된다.

“‘겹괴기담’은 구조주의 연극 중에서 가장 쉬운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스토리에만 집중하려고 해서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나온 두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고 쉬워요. 사실상 같은 내용이죠. 다만 두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겁니다. 요즘은 뉴욕도 예전만큼 실험적인 공연이 많지 않지만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공연은 (드라마가 강하고 상업적인 브로드웨이나 오프 브로드웨이와 달리) 그래도 뭔가 실험적일 것이라는 예상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구분 없이 드라마 중심의 연극만 하다 보니 실험극을 낯설어하는데요. 연극 내용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보면 구조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겹괴기담’의 무대는 6m×6m의 커다란 상자에 6개의 망사 막이 드리워져 있으며, 각각 1.2m 간격의 다섯 개 공간으로 나뉜다. 관객은 반으로 나뉘어 상자 양쪽에서 관람하는 형태다. 연극 ‘겹괴기담’ 팜플렛


“새로운 버킷리스트로 청소년극 연출 꿈꿔”

김우옥은 그동안 연출을 하지 않았지만, 공연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버킷 리스트의 일환으로 78살이던 2012년 뉴욕으로 떠났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젊은 시절 열정을 불태웠던 뉴욕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1년만 살려던 계획은 5년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그는 뉴욕에서 매주 2~3회의 공연을 관람한 뒤 후기를 SNS에 연재했다.

그는 “2010년 뉴욕의 유명한 실험예술 축제인 ‘넥스트 웨이브 페스티벌’에 영국의 거장 연출가 피터 브룩(1925~2022)이 참가했다. 당시 브룩이 85세였다. 나는 그 나이에 연출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는데, 단순히 브룩의 나이만이 아니라 축제 참가작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연출력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면서 “나도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는데, 앞으로 ‘별’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을 연출하고 싶다. 요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작품이 포함된 늘푸른연극제는 원로 연극인들을 위한 무대다. 올해는 ‘겹괴기담’을 시작으로 내년 2월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문턱’ ‘영월행 일기’ ‘꽃을 받아줘’가 차례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