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최근 심각한 자금 경색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자금시장 경색에 불을 붙인 것은 레고랜드 사태지만, 한전이 고금리 채권을 찍어대면서 시중의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채권 해외 발행 유도·채권 발행 대신 은행 대출 비중을 늘리는 방안 등을 고심 중인데, 시장에서는 관련 대책이 큰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전은 이달에만 채권 발행으로 1조59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올해 한전채 규모는 현재까지 23조원이 넘는다. 이달 기준으로 이미 지난해 전체 발행액 10조3200억원의 두 배를 넘어선 상태다. 문제는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AAA등급 한전채가 쏟아지면서 AA급 이하 일반 회사채가 투자자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은은 지난 20일 ‘BOK이슈노트’에서 “지난해 하반기 이후의 한전채 발행 급증은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여타 신용채권 수요를 구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짚었다. 이때문에 채권시장에서는 한전채 발행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제는 한전이 대규모 적자 때문에 채권 발행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한전은 현재 한 달에 수 차례 채권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를 멈추는 순간 심각한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전력 구매 부담 상승 등으로 올 상반기에만 14조303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수준이었던 지난해 연간 적자 5조8601억원을 크게 뛰어넘은 수치다.
이미 정부는 한전 측에 채권 발행을 최대한 자제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더해 정부는 한전채를 해외에서 발행하도록 유도하는 방안, 채권 발행 대신 은행 대출 비중을 높이는 방안 등도 추가로 검토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한전채를 해외에서 발행하면 국내 시장을 교란할 여지가 줄어든다”며 “대출 비중 확대는 시장 상황 등을 감안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한전 입장에서는 채권 발행이 대출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기 때문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당 대책들에 대한 기대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미 한전이 해외 채권 발행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작정 해외 채권 발행을 더 늘린다고 해도 해외 투자자 수요가 미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 비중을 확대하려고 해도 최근 은행들의 공포 심리가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정부 관계자 설명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전기 요금 정상화지만, 정부는 고물가 상황 등 때문에 전기 요금 인상을 최대한 억누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채권 발행 한도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한전은 올 연말 발행 여력을 거의 소진하면서 내년부터 신규 발행이 막힐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국회엔 발행 한도를 확대하는 법 개정안이 여럿 올라가 있다.
다만 채권 발행 한도만 키우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상당하다. 정부 관계자는 “전반적인 기업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채권 발행 한도만 키우면 자금 시장에 더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최근의 자금 경색 상황이 얼마나 갈지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