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그리운 언니 조안리 (3-3)

입력 2022-10-26 15:56 수정 2022-10-31 11:24

1980년에 태어난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당신의 책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을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번역해달라고 하였다. 미국의 100대 시인에 뽑힌 아들을 칭찬하며 가수 김건모의 노래를 작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막내아들은 “말이 안 돼요”라며 거절했다. “제가 선생님 같은 사랑을 해 봐야 번역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말에 언니는 “한방 얻어맞았다”며 폭소가 터졌다. 아들은 어렵다고 했지만 자신을 믿어주신 것이 감사해 7~8편을 번역해 드렸다. 그런 인연으로 대학 입학 때 아들에게 최상품의 컴퓨터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 이후 몸이 쇠약해져서 공기 좋은 곳을 찾고 있을 때 남편의 권유로 용인에 초원 같은 전원을 추천했다. 이후 십여 년을 함께 지냈다. 그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해외기업들을 국내에 유치시키고 세계에 3대 로비스트로 활약하기까지 국제관계와 군사 관계의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조율했다. 세계대학생평화봉사사절단을 한국에 유치하고 세계시장에 한국의 젊은 여성 지도자들을 세우려는 발상은 애국애족의 굳건한 철학이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니키가 날 좀 도와주어야겠다”는 말에 언니를 찾아갔다.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선발대회 심사 위원장을 누굴 모시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긴 세월 드라마계에 한 획을 그은 삼화프로덕션 신현택 회장님을 추천해드렸다. 앙드레 선생님과 예술적 안목을 가지신 심사위원 몇 분들이 후원과 함께 직원들까지 챙겨 주어 동분서주 뛰는 언니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안 언니가 나를 찾아올 때는 늘 희소식을 들고 오셨다. 국제 여성 전문가들의 국제 모임 ‘존타 클럽’의 회장을 역임할 때도 내 손길이 필요했다. 언니를 보며 전문가는 세 가지에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일에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하며 시청각으로 주입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 모든 과정을 글로 남길 수 있다면 전문가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개인 지도 교사 같았던 언니는 내가 KBS 여성백과 프로 미용 방송 연사로 활동할 때도 극찬하며 연예계로 진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해박한 지식과 만 가지 장점보다 의리를 생명처럼 생각하는 철학을 소유한 조안 언니는 한국 여성에게 본이 되는 겸손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어떤 형제를 그리 자주 만나며 변함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의지할 수 있을까. 6~7년을 남편 따라 해외 생활하고 들어온 내게 미용 인생에 도움이 될 일이면 밤중에도 연락하고 남편을 설득하면서까지 나를 세워 주던 고마운 언니였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대회에도 조안리 언니가 국제관계에 깊이 관여했었다. “이번에는 20여 일 니키와 함께 갈 수 있다”고 나를 한국 대표의 샤프롱으로 추천해 주었다. 원장이 비워야 할 손실을 날짜 계산해서 당당하게 청구하라던 고마운 언니. 갑자기 건강이 좋지 않아 장시간 비행을 하는 것이 어려워 함께 못함을 아쉬워했다. 조안리의 명성은 세계적 로비스트로 이름이 거론되며 여러 종류의 국제회사도 경영했다.

어느 날 오후 미용실에 들렀는데 안색이 안 좋으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 당장에 병원엘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조안 언니는 의료진이 파업하여 뒤숭숭한데 이런 상황에 병원 신세를 져야 하니 참 난처하다고 하기에 그래서 더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나는 안달을 했다.

“그래, 니키, 병원에 가 볼게”하고 나갔는데 늦은 저녁까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는 너무 초조했다. 어디서 쓰러지지나 않았나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더니 오밤중에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용실을 나가자마자 바로 입원을 하고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공교롭게 그날이 의료 파업에 들어간 첫날이라 뇌수술을 하고 3일 만에 퇴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방배동 집에 찾아갔더니 ‘니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다행히 큰딸 앤젤라가 엄마를 지키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그날 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조안 언니는 계속되는 질병에 시달렸다. 이어 투석도 하게 되었다. 많은 일을 일궈낸 조선호텔 스타 커뮤니케이션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에 큰딸 앤젤라 곁으로 떠났다. 조안 언니는 미국 생활 중에도 자주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말을 했다.

작은딸 성미, 에이미는 나의 큰아들과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아이들 셋의 결혼식 때마다 축복해주신 언니는 책 재편집 출판 기념회에 어렵사리 한국을 방문했다. 언니는 “니키 손길이 필요하다”며 미국에서부터 연락을 주셨다. 이른 아침부터 조안 언니와 딸을 아름답게 꾸며 드렸다. 그동안 질병과의 투쟁으로 허약해진 다리를 만지며 간절한 마음으로 읊조렸다. ‘10년 만이라도 더 살려주시길….’ 아름답던 얼굴에 그려진 어두운 그늘과 잔주름을 보며 울컥 쏟아지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다.
2005년 월드미스유니버시티대회 기념촬영. 앞줄 가운데 조안리, 앞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김국애 원장.

딸들이 창조적인 엄마의 재능을 그대로 받았을까. 십여 년을 한국 영화계의 미주 지역 총책임자로 일하며 국위선양을 한 결과로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같은 작품이 대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안리의 후손이 세계시장에서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펼치고 석권할 날을 기대한다.

언니는 나의 졸작 ‘길을 묻는 사람’을 보내 드렸더니 조목조목 덕담과 칭찬을 시처럼 적어 보내주셨다. 예전에 미용 방송할 때부터 글쓰기를 권하던 언니였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반세기를 형제보다 더 자주 만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만남은 필연이다. 고요하라 잠잠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어떤 세력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조안리 남편 케네스 킬로렌(한국명 길로연) 신부와 조안리 언니의 삶을 통해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조안 언니는 벌써 천국에서 그 자상하고 인자한 아저씨를 만나셨겠지. 그 분은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고 죄악 세상이 그리도 좋았느냐고 물으셨을 것 같다. 고생과 수고가 없는 광명한 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 보따리를 안고 살아가며 주님 곁에서 다시 뵐 날을 기대하는 NICKI가.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