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남학생 P는 잠을 잘 때 자신의 약이 약병에서 떨어져 강아지나 어린 동생이 먹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약병이 꽉 닫혀 있는지 확인하며 밤을 지새웠고 한 알이라도 빠진 약이 없는지 하나하나 세었다.
P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 누군가를 칠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자전거 등하교를 할 수 없었다. 학원은 아예 그만뒀다. 학교가 걸어서 가기엔 먼 거리에 있어 아빠가 매일 아침 등교를 시켜준다. 아빠의 수고로 등교할 수는 있었지만, 이번엔 아빠의 자동차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꾸 차를 세워 확인하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많았다.
P는 자신의 생각이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안다. 그래도 불안이 올라오면 이를 회피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강박 행동 즉 확인하는 행동을 한다. P는 강박증으로 진단됐다. 강박증 치료에는 ‘노출과 반응 억제’가 효과적이다. 즉 강박 행동이 유발되는 상황에 노출해 이런 행동을 억제하고 견디며 서서히 불안이 감소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 극심한 일부 강박증 환자들처럼 P는 불안 상황에 노출하기를 극도로 힘들어했다. 강박 행동을 없애고 싶다고 했지만, 불안 상황에 노출하려 할 때면 두려워 도망갔다. 치료의 첫 번째 스텝에서 장애물이 생긴 거다. 이럴 때는 치료의 방향을 일단 선회해야 한다.
치료자: 내가 이 마술 지팡이를 흔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상상하세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P: 그러면 정말 좋겠어요.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 잠도 잘 자고 지각하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겠네요. 이상한 일을 하는 데 대한 변명거리를 고심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자전거를 타고 아빠의 도움 없이 학교도 가고 친구들처럼 학원도 다닐 수 있고요.
치료자: P에게 중요한 게 아주 많은 것 같네요.
P: 네, 그렇지만 이 거지 같은 강박증이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치료자: 글쎄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P: 또 약병을 확인하지 않고 침대에 머물거나 자전거 타는 걸 상상하라는 건가요. 그건 두려워서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가족이나 강아지가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해요.
치료자: P에게는 가족이 중요하군요. 아까 말한 그 불안한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P에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내가 약통을 확인하지 않으면 동생이 약을 먹어 죽게 될 거야’ ‘내가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 자동차가 사람을 칠 거야’ 같은 생각이 내 몸에 난 ‘주근깨’라고 상상해 볼까요. 주근깨도 내 몸의 일부이긴 하지만 나를 지배할 순 없죠. 주근깨를 지닌 채로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학교도 갈 수 있죠. 나는 그 주근깨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처럼 강박사고와 거리 두기를 하고 나서 P는 불안 상황 노출도 조금씩 고려하게 됐다. 낮은 수위로 상상 속에서 노출하는 것은 가능하게 됐다. ‘약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당장 확인하지 않는다고 상상하면서’ 차츰 그 불안한 생각과 거리 두기가 강화됐다.
P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강박 행동의 현실적인 대가를 이야기했다. P의 삶에서 일시적으로 불안을 줄이는 것과 자신이 말했던 중요한 가치(학교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 친구들처럼 학원 다니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 가족) 중 뭘 선택할지도 이야기해 봤다. 당신이라면 뭘 선택할까.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