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리 남편 케네스 킬로렌(한국명 길로연) 교수님은 내가 명동에 미용실을 오픈했을 때도 축하해 주러 오셨다. 두 딸을 데리고 머리를 다듬으러 오실 때마다 “니키! 영업은 잘돼요” 하며 따뜻한 마음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대할 때마다 조안 언니가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두 분의 삶에서 종종 엿 볼 수 있었다. 나는 두 분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소중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언니는 길 교수님의 병세를 얘기하면서 괴로워했다. 열 발가락이 점점 오그라들어 걷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수술 예약이 되어 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본인의 발로 걸어 제주도 한라산행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던 중 힘줄과 말초신경을 경락 요법으로 치료하는 분을 알게 되었다. 자꾸 오그라드는 발가락을 하나하나 펴놓는 기인을 만난 것이다. 그 치료를 계속한 이후 놀랍게도 발가락이 다 펴져서 어렵사리 제주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하게 되면 약을 장기간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약물 후유증이 심장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락 선생님도 걱정하셨다.
교수님은 수술 차 미국으로 건너가셨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고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뜻밖의 비보가 왔다는 것이다. 염려했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서너 달 후 함께 사시던 어머니까지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나는 남편과 함께 경찰병원 영안실을 찾아갔다, 언니는 나를 붙들고 통곡했다. 그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었다. 살면서 인연을 맺은 학우, 친구, 지인 친척과 아버지까지 외면하던 그녀 곁에는 늘 어머니가 기도하고 계셨다. 철없는 딸자식 등을 토닥거리며 함께 울어주던 엄마는 무정한 딸의 불순종이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딸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절규하며 기도하셨을까. 질시하고 삿대질하며 경멸의 눈으로 돌을 들어 치려는 군상들 앞에서 비참함을 딛고 일어선 딸,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가려는 딸을 하나님께 맡겨놓고 어머니마저도 훌쩍 떠나셨다.
조안리는 효녀였다. 그녀의 선택이 세상을 흔들어 놓았지만 양가의 가문에 인간의 작은 가슴으로 상상키 어려운 업적을 일궈냈다. 그토록 증오하시던 아버지께 효성스러운 사위 손자 손녀들을 선물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선 불가능했던 그 위대한 사랑은 고난의 절벽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부부가 되었다. 그녀는 불가능했던 사랑의 위대함을 실제로 실현한 하나님의 메신저다.
이 땅의 사제들이 모두 길 신부님의 본을 받아 혼배성사를 통해 아름다운 가정을 세운다면 실로 그건 거룩한 혁명이 될 것이다. 21세기의 인류에게 신선한 충격과 새 르네상스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에 순종한다면 청소년 범죄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거룩하게 훈련된 사제들이 가정이라는 작은 국가를 창조한다면 세상은 훨씬 밝아지지 않을까. 조안리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결혼이며 후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언니의 삶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박수를 보내며 지내왔다.
수많은 업적을 이루고 위대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떠났지만 그 사랑은 정지되지 않았다. 미래를 더 빛나게 만들어갈 두 분의 아름다운 후손이 있음을 참으로 감사하다.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이 출간하자마자 무려 70만부가 팔렸다. 그녀는 그 수익금을 약자들에게 나누고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자신에게 쓴잔을 마시게 한 모교에 거금의 장학기금을 내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질병이 창궐한 세상을 염려하여 서울대학교 내에 있는 국제백신연구소의 일까지 깊이 관여했다. 이 땅에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천연두가 사라진 것도 백신 덕분이라며 생명 살리는 일의 중요성을 의료세계와 세상에 알리는 스피치도 내 남편에게 의논하고 아들에게 대회장의 스피치를 맡기기도 했다.
1980년도 미스유니버스대회를 한국에 유치한 것도 조안리의 로비로 이루어졌다. 그때 한국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유니버스 뽑힐 당선자의 미용 헤어/메이크업(H/M)을 꼭 니키가 맡아 달라던 고마운 언니. 당시 5~6개월 전에 내 모든 신상정보가 미국 미스유니버스 본부에 올라있었다. 나는 태중에 세 번째 막내 아이를 임신하여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손발이 퉁퉁 부은 상태였지만 조안 언니의 성화에 산부인과에서 올라붙는 주사까지 맞았다. 국제관계 약속이라 작은 오차도 수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1980년 미스유니버스로 당선된 미국 션 웨덜리의 광고가 세계로 쏟아져 나가는 날이 21일이었다. 미스 유니버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웨덜리의 H/M의 마무리를 하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미용 전문가를 대동한 홍보팀인데도 동양미용의 탑 디자이너라고 나를 소개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다. 내 미용 인생에 후원자가 되어준 조안리 언니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