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구한말의 역사를 바라보는 더불어민주당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민주당만의 인식은 아니고 많은 국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기는 한데, 민주당 인사들과 지지층에서 그런 관념이 유독 도드라진다. 2006년에 개봉한 ‘한반도’ 얘기다.
한·미 해군과 연합훈련을 하러 동해에 나타난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을 두고 ‘친일 국방’ 논란이 불붙는 것을 보고 ‘한반도’가 생각나서 다시 찾아봤다. 이 영화에선 해상자위대 이지스함대가 욱일기를 펄럭이며 한국 영해에 근접해 한국 해군 함대를 향해 공격용 레이더를 조준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 긴장과 박력이 넘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결말을 보고 나면 차라리 전쟁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시시하고 허망하다.
주인공은 재야의 민족주의 사학자다. 대학에 있을 땐 대한제국사만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을사오적 규탄문’만을 레포트로 요구했던 초강경 외골수다. 문화센터 강사로 나가선 을사늑약이 뭔지도 모르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심도 없는 아줌마 수강생들에게 격분해 “이 여편네들 집에나 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라 팔아먹겠다는 새끼들’을 증오하며 “그렇게 일본이 무섭냐? 대가는 나쁜 놈들이 치르는 거지. 역사가 그렇게 가야 살맛 나지 않겠냐”고 말한다.
또다른 주인공인 대통령은 민족주의적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인물이다. 일본으로 인해 어떤 위태로운 사태를 맞게 된 그는 “100년에 걸쳐 우리의 주권을 침해했고, 또다시 침해하려는 일본을 세계의 법정에 세우겠다”고 일갈하고, 친일파 각료들을 향해선 “대한민국 통수권자로서 이 사태에 대해 민족의 자긍심을 지켜나가는 선택을 할 작정”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는 구한말 고종이 겪은 어려운 상황과 현재의 대통령이 겪는 위기를 자주 교차시켜 보여준다. 두 상황이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인데, 별로 공감은 안 된다. 고종에게 ‘나라의 자존을 지키려 애썼으나 불운했던 성군’이라는 정념이 심하게 투사돼 있어서 그렇다. 영화에선 고종이 친일 세력에게 독살되기까지 한다. 실제 고종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이랬으면 좋았겠다’고 바라는 고종의 모습이다.
“지금 대한민국에게 일본은 반드시 손잡아야 할 스폰서”라며 친일파 총리 편에 있던 국정원 일본 담당 서기관은 남북통일에 회의적인 총리에게 실망해 대통령과 재야 사학자 쪽으로 갈아탄다. 그는 총리에게 “통일은 한민족의 소원이고 한반도의 숙명적인 과제이지 않습니까”라고 따진다. 재야 사학자는 이 서기관에게 “통일의 조건을 따지는 사람들의 생각 끝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냐. (통일을) 안 하겠다는 거다. 일본에 기대서, 미국에 빌붙어서 쌓아온 것들을 하나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으니까”라고 말한다.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친일·친미 기득권자여서 같은 한민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투다.
고종이 숨겨놓은 국새를 재야 사학자가 찾으면서 모든 사태가 해결된다. 일본은 고개를 숙이고 친일파 총리는 물러난다. 재야 사학자와 대통령의 승리다. 대통령은 일본 외무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1세기 전 이 국새가 찍히지 않은 채 체결된 일본과의 모든 조약과 계약서들을 재검토할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국제사회에 알릴 것이고 일본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위로를 우리에게 줘야 할 겁니다.” 한방 크게 먹은 외무상은 대통령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이렇게 연설한다. “지난 역사의 과오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일본은 지난 세기에 청산하지 못했던 배상금 문제를 신중히 재검토할 것이며 동북아 역사 바로잡기에 적극 동참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해 한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응축된 발언인데, 이렇게 중요한 걸 일본 총리에게 안 시키고 고작 외무상에게 시키니 영 힘이 없다.
최고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강우석 감독은 자신만만하게 ‘한반도’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당시 평도 ‘웰메이드 배달의 기수’라는 식으로 좋지 않았다. 그는 개봉 전 인터뷰에서 민족주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참 이상하다. 민족주의가 뭐가 나쁜가”라고 반문했다. 난 과도한 민족주의와 국뽕은 올바른 현실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지난 정권은 북한과 밀착하면서 일본과 갈등했고,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북한과의 밀월은 허망하게 깨졌다. 현 정권은 북한의 핵 위협 속에 일본과의 갈등을 풀어보려 애쓰고 있다. 친북·반일과 친일·반북이 어지럽게 오간다. 유연한 줄타기 같은 게 가능하면 좋으련만 우리에겐 양극단만 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