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스트롱 페이스!(Strong faith·강한 믿음)”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지난 삶을 하나씩 반추하며 이야기를 풀어낼 때마다 이 노(老)신사의 재킷 상의 가슴에 붙은 한·미 양국 국기 모양 배지가 빛이 났다.
미국 이민 1세대 최초로 1992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뒤 상·하원에서 5선 의원을 지낸 임용근(87·미국명 존 림) 전 미 오리건 주의회 상원의원이다.
임 전 의원을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최근 펴낸 자서전 ‘버려진 돌 임용근 스토리-청소부에서 미국 오리건주 상, 하원 5선까지’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임 전 의원은 자서전을 어루만지며, “오로지 신앙, ‘믿음’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에 함께 자리한 아내 임영희씨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 전 의원은 이날 열네 살이던 6·25전쟁 당시 ‘빨갱이’로 몰린 부친을 총살로 보내야 했던 이야기부터 로버트 모건 전 한국컴패션 대표와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이야기, 이후 정착한 미국에서 사업체를 일구고 상·하원의원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히 풀어냈다.
이런 그의 지난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자서전 제목처럼 ‘버려진 돌’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으로 점철되는 그이지만, 과거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성경에 나오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돌’과 같았다.
그는 “부친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시고, 연좌제로 가족 전체가 ‘빨갱이 집안’으로 내몰렸을 때, 그때의 난 처음으로 국가에 의해 버려진 돌, ‘리젝티트 스톤(rejected stone)’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책에는 이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미군 부대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던 ‘하우스보이’였던, 버려진 돌과 같았던 그가 1966년 도미해 청소, 세탁일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이뤄낸 ‘아메리칸 드림’이 담겼다. 이방인이 미 정치인으로 성장해나가기까지 그가 몸소 겪은 한인 이민사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임 전 의원이 90년 가까운 삶을 살며 깨달은 바는 “이 세상 모든 일은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더라”는 것이다. 열일곱 살 때 7년 넘게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절망을 딛고 부단히 암기했던 영어 단어는 그의 기초 실력이 됐고, 이는 훗날 그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이어졌다. 서울신학대를 졸업한 후 경기도 여주에 능서교회를 개척해 전도사로 사역하던 1966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의 교회는 한국컴패션의 후원을 받았다. 한국컴패션이 주최한 사경회에서 모건 당시 대표를 만난 그는 영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짧은 만남을 기억하며 임 전 의원의 영어 실력을 눈여겨본 모건 전 대표가 컴패션 후원 아동으로 구성된 중창단의 미국여행 인솔과 통역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한 4주간의 여행 중 그는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WES)에 원서를 내게 됐고, 유학과 함께 미국에서의 삶도 시작됐다.
숨 가쁘게 지난 삶을 되돌아본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도 모르는 어떤 큰 손이 직, 간접적으로 내 삶을 인도하셨다는 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뤄진 것이란 걸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숱한 역경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임 전 의원은 이를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성공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날 때 타인이 판단하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아홉 살 때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 만난 하나님, 그의 말씀이 내 삶에 없었다면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큰 산 밑에는 큰 골짜기가 있는 법”이라며 “지금까지의 시련이 지금의 날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책을 펴낸 이유도 다음세대를 비롯해 자신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를 말해주고 싶어서다.
그에게 요즘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버려진 돌’이라도 하나님은 요긴하게 쓰십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하죠. 어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며 희망을 품길 바랍니다. 스트롱 페이스!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글·사진=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