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그리운 언니 조안리 (3-1)

입력 2022-10-21 14:30 수정 2022-10-24 12:22

나는 우연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만남에 운명이 아닌 것이 있을까. 반세기 가까이 인연을 맺고 변함없이 안부를 물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남편과 자식 문제를 감추고 사는 세상에서 흉허물없이 만사를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사이라면 그건 분명히 하늘이 맺어준 필연일 것이다.

내 나이 30대에 접어들어 미용인으로 꿈을 성취하기 위해 꼭 취업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곳이 조선호텔미용실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권유로 취미 삼아 배웠던 미용이 나의 천직임을 깨닫게 된 이후 설정한 꿈은 한고비 또 한고비 날개 펼치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대 미용기술이나 문화적으로 우리나라 최상인 조선호텔미용실에 취업하게 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재능을 인정해주신 이연희 원장님의 연락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 미 8군 안에도 7~8개의 숍을 운영하셨고 미국 현지 워싱턴 의사당 옆에도 뷰티 숍을 운영하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가진 여걸이었다. 민간외교관으로 손색없는 처세술은 나에게도 귀감이었다.

당신의 소중한 지인들과 중요한 모임에서나 외국인과 방문객들을 접할 때마다 나를 찾도록 하셨고 내 (예명 ) ‘니키’라고 엄지척을 세우며 홍보해 주셨다. 어느 날 퇴근 시간에 커피숍으로 나를 부르시더니 조안리를 소개해 주시며 서로 바쁘니까 니키가 늦은 시간이라도 머리를 틈틈이 만져 드리라고 부탁했다. 예의 바르고 스마트한 그녀를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때 각 신문과 주간 여성지 1면 화제의 주인공 아니던가.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세상의 질타를 받는 안쓰러움에 꼭 한번 보고 싶었던 분이다.

원장님은 내게 조안리의 취향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바지 차림에 포니테일을 즐겼다. 포니테일의 매력은 앞머리에 있다고 알려준 후로는 스스로 머리를 빗고 내려와 내게 잘 빗었느냐 묻곤 했다. 내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잠시 다녀가시라고 하면 “자존감을 살려줄 니키가 내 곁에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고 덕담을 하곤 했다. “니키도 어린아이가 둘이라고 들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일하는 것 어려움이 많죠?”라고 물었다. 남편이 해외 근무를 한다니 아이들이 많이 외롭겠다고 위로를 해 주었다. 내 땅 내 나라에서 하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우리는 이 세상에 훈련받으려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속에는 수많은 얘기가 숨어있었다.
2005년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조직위원장 조안리(왼쪽)와 심사위원 김국애 원장.

조안리를 떠올리면 모든 수식어를 다 동원해도 부족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그녀의 용기는 잔다르크 같았다. 그녀의 결정은 신의 부름에 힘입었을까. 신비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니키, 이제부터 우리 언니 동생으로 지내요”라고 했다. 조선호텔 홍보부장으로 입사한 그녀는 일약 화제대상이었다. 호텔 안팎에서 입에 오르내릴 만큼 대한민국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어 구사력과 탁월한 언변과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관계자들은 조안리 홍보 매니저의 눈부신 경영 능력으로 조선 호텔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입을 모았다.

“저이가 그 신부와 결혼한 조안리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게 묻고 눈살 찌푸리는 고객들이 있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핍박이 더 심했다. 가족과 측근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진압하고 살아 나왔을까 싶었다. 바티칸의 예수회,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거룩한 성벽이라고나 할까. 소년의 나이에 사제가 된 케네스 킬로렌(한국명 길로연) 신부님은 한 소녀를 사랑한다고 무작정 엑소더스를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순한 양처럼 끝까지 바티칸의 엄격한 법 테두리를 차근차근히 밟아 질서를 지키며 탄원하고 호소하면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해냈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하고 물리적인 여러 방법에도 굴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사랑’에 대한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려주신 인생 최대의 선물로 받아들였을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믿고 준행하라는 어떤 신비의 체험 없이는 불가능했을 투쟁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