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재정은 국민연금 만큼이나 시급한 개혁 대상으로 꼽힌다. 건보 재정은 일찍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20일 ‘2020~2060년 건보 장기 재정 전망’에 따르면, 건보 적립금은 2029년에 전액 소진되고 2040년에는 누적 적자가 678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50년에는 2518조원, 2060년에는 5765조원으로 누적 적자가 급증한다.
건보 재정이 급격히 악화하는 이유는 저출산 고령화 때문이다. 한국은 2025년 고령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관측된다. 건보료를 내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보험금을 타가는 노인 비중은 늘어나는 구조가 점점 심화될 것이 불가피하다. 문재인정부에서 시행된 보장성 강화 정책도 건보 재정을 악화시킨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문제는 건보 재정 건전화의 ‘방향성’이다. 건보 재정 건전화에 대한 공감대는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건보 재정에 대한 외부 통제 강화 등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다만 건보를 기금화할 경우 보험재정 운용 주체가 모호해지고, 제도 운영의 경직성이 커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국고지원 늘리기’ 에만 꽂힌 정치권
최근 건보 재정 관련 논의는 올해 말 일몰이 예정된 국고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주로 맞춰져 있다. 현행법상 건보 국고지원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효력이 사라지는 일몰제로 운영되고 있다. 2007년부터 5년 일몰제로 운영됐고, 세 차례에 걸쳐 연장됐다.
일몰제 폐지 주장의 근거 단순하다. 국민건강을 책임지는 것이 국가의 책무인 만큼, 영구적으로 건보에 국고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21대 국회에는 국고지원 일몰 규정을 삭제하고 지원 규모를 지금보다 늘리는 내용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이 5건 발의돼있다. 이와 관련해 건강보험공단도 법 개정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가파르게 악화하는 건보 재정을 언제까지 국고지원으로 충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국회 등에 따르면 정부 지원금이 첫 도입된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간 누적된 정부 지원금 규모는 약 94조5000억원으로 파악된다. 향후에 건보 재정이 빠르게 악화되고, 투입되는 지원금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시 국가 전체 재정 건전성 전체 문제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국고지원 확대 근거로 선진국 사례를 든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야당 간사인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전체 재정의 20%도 국민 건강을 위해 국가가 부담하지 않는다”며 “일본은 40%를 국가가 부담하고 프랑스도 그렇다”고 최근 국정감사에서 언급했다. 다만 이는 엄밀하게 보면 사실과 다르다. 조세재정연구원의 ‘건보 재정 중장기 운영방향 연구’에 따르면, 국고지원 비율이 한국보다 높은 프랑스·대만·일본은 건보 재정 지원 구조나 범위가 각각 달라 단순 비교가 어렵다.
가령 국고지원 비율이 57% 수준으로 알려진 프랑스는 재원을 사회보장부담금과 목적세 등으로 조달한다. 또 국고지원 규모에 공무원·교원 부담금, 의료급여 등 저소득층 지원제도가 모두 포함된다. 조세연은 “재정지원구조가 우리와 유사한 독일은 국고지원 수준이 6%로 낮고, 국고로는 출산급여·상병수당 등 보험급여 이외만 지원 가능하다”고 말했다.
외부 통제 강화 목소리 힘 얻을까
오히려 건보 재정의 개혁 방안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기금화 등 외부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기금을 설치하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관리·운영하도록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국회에 발의돼 있다.
건보 기금화는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2004년부터 건보 재정이 국회 통제를 받지 않고 있어 국회 예산 심의 권한을 제약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어 왔다. 기금은 특정한 분야의 사업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자금이 필요한 경우 예산과 별도로 정부가 직접 자금을 조성해 운용하거나 민간이 조성해 운용하는 자금에 출연하는 것을 말한다.
건보는 다른 사회 보험성 기금과 달리 건보공단의 일반회계로 운영되며, 정부 지원금을 제외하고는 예결산에 대한 외부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 실제 건보·노인장기요양보험을 제외한 6개 사회보험(국민연금·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고용보험·산재보험)은 모두 국가재정에 포함돼 기금으로 운영되며, 기금운용계획이나 결산에서 국회의 심의·의결을 거치는 방식으로 통제를 받는다.
앞서 20대 국회 복지위 전문위원실은 “건보는 건보공단 자체 재정으로 관리되고 있어 재정건전성에 대한 국가의 최종적인 책임 구조가 명확하지 않다”며 “건보 재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건보 재정을 기금화해 국가재정에 편입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도 지난 7월 ‘건보 재정관리 실태’ 감사보고서에서 “건보가 국민 보건 향상이라는 제 역할을 다하려면 무엇보다 재정 고갈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상태가 돼야 한다”며 “건보 재정의 지속가능한 운용을 위해서는 기금화 등 방식을 통해 현재의 건보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짚었다.
하지만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일단 국회 심의·의결 과정에서 의료계나 시민단체 등 이익단체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지금도 매년 수가 협상이나 보험료율 결정을 할 때마다 난항을 겪는데, 관련 의사결정이 훨씬 지지부진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건보 재정 운영 특성상 기금화가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건보는 매년 수지균형을 목표로 하는 단기보험으로 신축적으로 운영돼야 할 필요성이 높다. 그런데 기금화되면 정부의 일반회계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훨씬 경직성을 띄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복지부는 이와 관련해 코로나19 등 재난 상황 시 국민 의료 수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한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