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지도를 열어 내일 가야 할 1400m 치앙라이 고산지대에 위치한 띠새교회 위치를 검색해 보았다. 치앙라이는 태국 북부지역의 맨 끝에 있는 도시였다. 순간 나는 그곳이 태국의 ‘갈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콩 강으로 분기되는 태국, 미얀마, 라오스가 연접한 산악지대가 골든트라이앵글이다. 이 지역은 마약 왕 쿤사의 본거지였을 만큼 생아편이 재배되고 미국 뉴욕으로 반입되는 헤로인의 80%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마약과 도박, 우상에 사로잡힌 한 마리의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연민이 몰려왔다. 만일 이 지역이 기독교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된다면 태국, 미얀마, 라오스를 넘어 베트남,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의 지도가 바뀔 것이다.
나는 태국 북감리회의 본부가 있는 태국 치앙라이 위앙캄파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박은호 선교사를 돕기 위해 감리교 충청연회 당진지방회 소속 회원들로 구성된 골든선교회와 함께 지난 2일~8일 치앙라이로 왔다. 골든선교회 회원들은 선교의 영에 감동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15년 전 박용선 목사가 시무하는 충남 당진 유곡교회의 파송으로 태국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박은호 선교사는 지금까지 28개 교회를 건축하고 현재 출입 가능한 지역에 소재하는 26개 교회를 돌며 활발히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감리교 충청연회뿐만 아니라 당진지방회에 속한 여러 교회 회원들이 돕고 있는데 탑동교회 박용완 원로목사가 회장을 맡아 2017년부터 매년 1∼2차례 선교지를 방문하는 등 물질과 기도로 동역하고 있다. 박은호 선교사를 파송한 유곡교회는 물론 연회와 이 지방회 감리사인 문화시티교회 여인달 목사가 한마음이 되어 힘을 보태고 있다.
이번 방문에는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3년 만에 다시 찾은 터여서 선교지의 많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과거에 매입한 토지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노후했던 신학교와 청소년 기숙사 시설도 많이 개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인해 발길이 뚝 끊긴 외로운 선교지에서 몸부림쳤을 박은호 선교사의 투혼이 느껴졌다. 박 선교사는 3년의 길고 외로운 시간 동안 스스로 선교지를 돌아보는 성찰과 더불어 선교지 스스로 자조(自助)와 자강(自强)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니 박 선교사에게 있어 코로나는 쉼 없는 발산과 성장을 경험한 축복의 시간이었으리라.
띠새교회로 가는 길에 내 좌석 뒤편에 앉았던 탑동교회 박용완 원로목사의 윤애진 사모는 “이 험난한 산중에 어찌 이런 마을 구석 구석을 찾아다니며 교회를 세웠을까?” 하는 감탄과 더불어 “주여, 주여”를 연발했다. 우리가 탄 일제 사륜구동 차량은 빗물에 젖은 언덕길을 춤을 추듯 미끌어지며 올라갔다. 길 옆을 바라보니 아득한 낭떠러지여서 생명을 건 레이스였다.
마침내 도착한 띠새마을은 첫인상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미사일처럼 생긴 험준한 산이 마을 뒤편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어 이 마을이 영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미사일 봉을 뒤편에 두고 마을의 제일 높은 언덕에 우뚝 서 있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마을 라우족 추장 띠새는 태국 북부지역 일대에서 알아주는 무당이었다. 그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병원에서도 손 쓸 다른 방도가 없어 마을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생사를 헤매던 어느 날 “띠세야, 네가 이대로 죽으면 너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마침 이때 고산지역 소수민족을 위한 마을교회 지을 곳을 찾고 있던 박 선교사는 띠새의 소문을 듣고 골든선교회 회장 박용완 목사와 상의해 이 위치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 위치는 원래 마을 언덕 위 무당이 굿하는 산당 자리였다. 교회 건축을 위해 산당과 기물을 모두 불태우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고 추장 ‘띠새’의 이름을 따서 ‘띠새교회’를 세운 것이다. 박용완 목사는 띠새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고 귀뜸을 해 주었다. 사연인즉, 미얀마에서 국경을 넘어 이곳 띠새마을로 ‘나쏘’라는 새댁이 시집을 왔다. 그녀는 미얀마에서 살 때 예수를 믿었는데 이 마을로 시집온 이후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의 핍박이 심했다고 한다. ‘나쏘’는 띠새마을에 예배당이 세워져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매일 빠지지 않고 기도를 했고, 기도한 지 11개월 만에 띠새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다.
나는 낮에는 동네 사람들과 현지 목사님들, 추장 띠새의 머리를 깎는 등 이발봉사를 하고. 신학교가 있는 위앙캄파에서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함께 간 박용학 전도사는 예배 때마다 섹소폰으로 찬양했고 나와 함께 신학생들에게 강의도 했다.
함께 간 다른 대원들은 침술과 잡채, 김치와 같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민들을 섬겼는데 침술과 잡채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나는 이번 단기선교에서 당진 문화시티교회 김근화 장로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침술로 의료봉사를 했다. 나는 코를 심하게 골아 늘 골치였다. 방 배정에서 처음 만난 김 장로와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나로 인해 잠 못 이룰 김 장로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김 장로는 늘 웃으며 자기는 적응력이 탁월한 사람이어서 하루 만에 다 적응되었다며 도리어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은 진실된 주님의 종이 아닐 수 없었다.
셋째 날에는 태국 북감리회 본부가 있는 위앙캄파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이곳은 마을교회, 신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다. 나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사영리’를 강의했다. 신학생들은 조를 나누어 스스로 밥을 짓고 빨래와 청소를 했으며, 나이 어린 동생들 공부도 가르쳤다. 박 전도사와 나는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를 찾아가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이번 단기선교에서 느끼는 감회가 누구보다 남달랐다. 낯선 이역 오지에서 28개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와 청소년 기숙사를 지어 사역을 이어가는 박은호 선교사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군사였다. 그를 보면서 국내에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겁을 내며 위축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넷째 날은 프라폰교회에서 봉헌예배와 야간 부흥집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사업도 잘되고 모든 게 술술 잘 풀렸지만 자손이 없어 고민하던 미국에 거주하는 김숙희 권사가 큰딸이 손자를 낳자 감사의 마음으로 세운 교회가 프라폰교회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 찾던 단골 커피숍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단기선교는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복음을 위해서 움츠러들지 말고 담대히 달려가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현대는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 성령님은 선교의 영이시며 그분은 우리가 선교하기를 원하신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선교하지 않는 교인은 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태국 치앙라이 단기선교의 부름에 순종하자 모든 것은 주님이 다 하셨다. 나를 태국 치앙라이로 불러 목회를 앞둔 내 눈을 넓게 열어 주시고, 내 입을 크게 벌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태국(치앙라이)=김용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