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대에 극장에서 16시간 걸리는 바그너 오페라 보는 이유?

입력 2022-10-17 06:00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이 지난 7월 초연한 뒤 10월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에서 선보이고 있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중 첫 편인 ‘라인의 황금’ 장면. 한국 출신으로 만하임 극장 상임 연출가인 요나 김이 연출했다.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

“오페라 연출가에게 바그너의 ‘링 사이클’(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연출은 특별합니다. 워낙 대작이라 공연을 올리기 쉽지 않은 만큼 평생 한 번도 못 해보는 연출가도 많거든요.”

16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니벨룽의 반지’ 첫 편인 ‘라인의 황금’ 공연을 앞두고 만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 요나 김은 “2015년 국립오페라단에서 ‘후궁 탈출’을 연출한 지 7년 만에 고국인 한국에서 내가 연출한 ‘링 사이클’을 선보일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면서 “예상도 못 한 링 사이클을 연출한 것이나 내한 공연을 하게 된 것을 보면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웃었다.

한국 출신 요나 김, 독일 만하임 극장서 연출

올해로 19회째인 대구국제오페라축제(9월 23일∼11월 19일)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라인업에 포함해 개막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이 지난 7월에 공연한 최신 프로덕션으로 만하임 극장 주역 가수와 오케스트라, 합창단 등 240여 명이 내한했다. 만하임 국립극장은 이날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17일 ‘발퀴레’, 19일 ‘지그프리트’ 그리고 23일 ‘신들의 황혼’을 차례차례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의 상임 연출가 요나 김.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를 기반으로 바그너가 새롭게 만든 작품으로 공연 시간만 4일간 16시간이 걸린다. 바그너가 28년에 걸쳐 쓴 역작이자 독일어 오페라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오페라 애호가층이 두텁지 않은 국내에선 보기 어려운 작품이다. 국내에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모두 공연된 것은 지난 2005년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초청 공연 이후 17년 만이다.

“지난해 7월 만하임 극장으로부터 새로운 링 사이클 프로덕션을 2021-2022 시즌에 올리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대개 유럽 극장에서 링 사이클 제작에 2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가지는데, 말도 안 될 정도로 준비 기간이 짧아서 망설였습니다. 바그네리안(바그너 음악 애호가)들의 비판이 걱정되더라고요. 그런데, ‘링 사이클 연출가는 어떻게 해도 바그네리안으로부터 욕먹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링 사이클을 연출할 수 있는 행운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죠.”

1779년 설립된 만하임 국립극장은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극장 가운데 하나다. 고전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전속 작가로 활동하는 등 독일 예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적지 않다. 오페라와 관련해선 만하임에 독일어권에서 가장 큰 바그너협회가 있는 만큼 만하임극장 역시 바그너의 작품들을 자주 올리고 있다. 특히 만하임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여름에는 ‘바그너의 성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가서 활동하는 만큼 웅장한 금관으로 대표되는 ‘바그너 사운드’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나 김이 연출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의 ‘니벨룽의 반지’ 중 ‘지그프리트’의 한 장면.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

요나 김 연출가는 “바그너의 삶이나 나치 독일에서의 위상 등 여러 이유로 독일에서도 바그너 음악에 대한 호오가 있다”면서 “만하임의 경우 극장의 관객과 소속 아티스트들이 바그너에 대한 열정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바그너 오페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2011), ‘파르지팔’(2013), ‘로엔그린’(2016)을 연출한 적 있다. 그동안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서 꽤 안다고 생각했지만 방대하고 철학적인 링 사이클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무대에서 라이브 영상 활용해 현장감 증폭

요나 김은 남성 중심의 유럽 오페라 연출계에서 동양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형 오페라극장 상임 연출가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연극학 수업의 일환으로 극장을 다니며 극예술에 빠지게 됐다. 이후 2004년 독일 드레스덴 잼퍼 오페라로부터 작품 위촉을 받았던 작곡가 아드리아나 횔츠키를 만나 ‘맨해튼의 선신’으로 대본 작가가 됐으며, 이듬해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자이데’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했다. 지금까지 30여 개의 오페라를 연출하고 6개의 창작 오페라 대본을 쓴 그는 독일 최고 권위의 극예술상인 파우스트상에 2010년·2020년 두 차례나 노미네이트됐고 2017년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의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됐다. 또 2014년 대본을 쓴 ‘악령’은 올해의 최우수 창작극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오페라 연출가 겸 대본작가로서의 활동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오페라 연출과 관련해 작품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자신만의 해석과 색깔을 담은 연출을 할 수 있다고 봐요. 또한 한국적인 감성 역시 연출에 도움이 됩니다.”

요나 김이 연출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의 ‘니벨룽의 반지’ 중 ‘신들의 황혼’ 의 한 장면.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

이번 링 사이클 역시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과 미학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현지에서 받은 바 있다. 이날 공개된 ‘라인의 황금’을 놓고 볼 때 그는 신들을 돈 많은 상류층에 대입하는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 가득한 모습으로 해석했다. 이와 함께 무대 세트를 대부분 없앤 대신 카메라맨의 라이브 영상을 무대에 투사하는 방식의 연출을 선보였다.

“최근 오페라에 영상이 자주 사용되고 있고 저 역시 다큐적인 성격의 영상을 몇 차례 활용한 적 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카메라맨이 무대 위아래를 오가면서 성악가, 오케스트라, 백스테이지의 모습을 찍어서 스크린에 투사하는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영화적인 현장감을 줍니다. 사실 무대 세트를 최소화면서 영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코로나 시대에 작품 제작의 불투명성 때문이었지만 막상 시도해보니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오더라고요.”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사람들이 넷플릭스 같은 OTT에 친숙해진 요즘 극장에서 16시간이나 걸리는 바그너의 링 사이클을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링 사이클은 출연진과 스태프만이 아니라 관객도 신체적·정신적인 극단까지 몰아가는 작품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극장에서 16시간이나 함께 보낸다는 점에서 최고의 공동체적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한다”면서 “넷플릭스 시대에도 오페라를 포함해 공연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