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 13~14일 전투기 위협 비행과 해안 포사격, 탄도미사일 발사까지 전례 없는 육·해·공 3중 도발을 감행하며 9·19 남북군사합의를 노골적으로 위반했다. 한국 정부가 먼저 9·19 군사합의 파기를 공식화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북한이 ‘꽃놀이패’로 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은 14일 하루 동안 총 560여발에 달하는 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낙탄 지점은 9·19 합의에 따라 사격이 금지된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완충구역으로, 명백한 합의 위반이었다. 13일 야간에는 북한 군용기 10여대가 동·서부 비행금지구역 북방 5~7㎞ 지점까지 접근하는 위협 비행을 실시했다. 2018년 9·19 합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포사격이 남측 포사격에 대한 ‘대응시위사격’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책임을 남측에 전가했다.
북한이 한국 정부가 처한 ‘딜레마’를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이 9·19 합의를 계속 어겨도 한국 정부가 먼저 합의 파기를 선언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파기를 공식화하는 순간, 한반도 긴장 고조 책임을 한국 정부에 떠넘기고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명분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9·19 합의를 명목상 유지하는 것은 북한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국지도발 등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실효적 조치를 담은 9·19 합의가 없다면, 재래식 전력이 한·미에 비해 열세인 북한은 유사시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9·19 합의를 대놓고 깬 만큼 이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레드라인’을 긋고 합의 준수를 요구하는 원칙적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16일 “북한이 정치적 계산을 끝내고 한국에 공을 떠넘긴 것”이라며 “7차 핵실험 등 남북 간 상호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는 9·19 합의의 기본 정신을 완전히 위배하는 무력시위를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고, 위반 시에도 파기보다는 효력 정지 등으로 명분을 챙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도 “지금으로선 합의 준수 원칙을 강조하는 게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우리에게 충분한 명분을 쌓아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9·19 합의는 상호 준수가 중요하다”며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감행할 경우 9·19 합의 효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을 찾아 대응태세를 점검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정당한 우리 측 사격훈련을 ‘고의적 도발 책동’이라고 억지 주장하면서 9·19 합의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도발이자 의도된 일련의 도발 시나리오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성동격서식 도발이 발생할 경우 추호의 망설임 없이 단호한 초기 대응을 시행하는 현장 작전 종결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우진 신용일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