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삼 작가 “58만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양귀비 사진 접었다”

입력 2022-10-16 06:25 수정 2022-10-16 17:36
현대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을 위한 연합포럼’에서 프로젝트 ‘레드림(REDREAM)’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3월 뉴스엔 한 남성이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뛰어 들어오는 장면이 나왔다.
남성의 품엔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주택가로 쏟아진 포격에 부상당한 18개월 아기가 안겨 있었다. 순수미술과 공학기술을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한 전병삼 작가는 뉴스 속 우크라이나 남성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는 “5년 전 아주 어린 아들을 하늘로 보냈다. 중환자실에서 아들에게 작별 인사하던 그날의 내가 떠올랐다”며 “그때부터 그들을 위해 해야 할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레드림(REDREAM)’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크라이나지원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을 위한 연합포럼’에서 전 작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인데 이에 대한 지원은 공백”이라며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바로 문화를 통한 위로다.

그는 “그들을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방법 중 하나가 문화다. 그런 관점에서 자비량으로 수개월째 작품을 만들고 준비해 다음 달 2.5t의 작품을 가지고 플란드로 떠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혼자 준비한다고 생각했는데 저처럼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이곳에 와서 알게 됐다. 그것도 (제가) 출석하던 교회라는 점에서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현대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레드림(REDREAM)’의 소개 사이트.

포럼이 끝나고 전 작가를 만나 프로젝트 이야기를 좀 더 들었다.
전 작가는 “5년 전 갓난 아들과 작별한 뒤 나는 처참히 무너졌고 영원히 절망 속에 살게 될 거라 생각했다. 수년이 지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사랑하는 아이를 잃는 걸 목격하니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전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로하기로 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물건을 활용한 예술작품으로 잘 알려진 현대미술가다.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시카고예술대학에서 미술석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학석사를 마친 뒤 유네스코(프랑스), SIAF(일본), 아시아그래프(중국) 등을 포함한 120여회 국제전시에 초대받아 작품을 선보였다.

2015년엔 공예축제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나서 메인 행사장인 연초제조창 건물 외벽에 9개국 31개 도시에서 2만7912명이 보내준 30만8193장의 폐CD로 장식한 거대한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미술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나와 내 가족이 미술작품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와 같은 경험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자격이 있나를 끊임없이 물었다. 고민하던 전 작가가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건 지인의 한 마디였다. ‘지금은 자격을 논할 때가 아니라 무엇이든 해야 할 때’라는 말이었다.

현대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레드림(REDREAM)’ 작품.

이때부터 전 작가는 가로 10㎝, 세로 4㎝의 긴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붉은 양귀비 꽃 사진과 ‘나의 마음이 항상 당신과 함께 합니다(MY HEART IS ALWAYS WITH YOU)’라는 문구가 인쇄된 종이다. 이를 반으로 접어 아코디언처럼 108장을 차곡 차곡 쌓으면 가로 10㎝, 세로 10㎝의 사각형이 된다.

전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 해바라기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꽃이고, 양귀비는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꽃이라고 한다”며 “양귀비 사진을 접을 때면 거기 인쇄된 문구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58만3308번의 기도”라고 설명했다.

현대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레드림(REDREAM)’ 작품.

108장을 쌓아 10×10짜리 사각 블록을 총 5401개 만들려면 58만3308장을 접어야 한다. 5401개는 지난 8월 8일 UN이 공식발표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가 5401명을 기억하기 위해 나온 수다.

영상 등을 통해 프로젝트 소식이 알려진 뒤 작업실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며 자원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함께 사진을 접고, 박스를 접었다.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달 작업이 마무리되면 전 작가는 다음 달 초 한국에서 프리뷰 전시를 한 뒤 폴란드로 갈 계획이다. 부담은 있다. 무게만 2.5t인 작품은 종이라 모두 비행기로 옮겨야 한다. 갖고 있는 재정과 후원으로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두려움보다는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전 작가는 “한국 사람은 우크라이나 들어갈 수 없어 인접한 폴란드로 가져가 피란민들이 있는 곳에서 5401개 블록을 펼쳐놓을 예정”이라며 “작품은 5401명의 비석인 동시에 봄에 아름답게 핀 양귀비 꽃밭이 돼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최종 목표는 전쟁이 끝나면 작품을 우크라이나 미술관이나 국가기관에 작품을 기증해 전시하고 5401개의 박스를 5401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