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토바’를 만난 것은 1988년 초여름이었다. 그해 우리나라 서울은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세계는 우리나라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그나토바’는 리듬 체조 4관왕으로서 한국의 체조 대표팀을 훈련시키기 위해 우리나라에 초청되었다. 불가리아 출신인 그녀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줄곧 내 미용실의 고객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불가리아의 미인이었다. 체조로 단련된 늘씬한 몸매와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는 빛이 났다. 통제 국가인 불가리아의 어두운 현실에서 탈피한 듯한 품성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그녀는 불가리아를 한 단계 높이 올려놓은 리듬체조계의 세계적 선수다. 당시 그녀는 문밖에만 나가면 수많은 시민의 물결 속에서 사인 공세를 받았다. 한때는 불가리아 대통령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고 했다. 그런 위치에서도 늘 겸손한 성품을 지닌 그녀는 어디서나 융숭한 대접을 받기에 적절한 인격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88올림픽을 알리는 대한민국의 홍보대사라는 마음으로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의 동료들이나 선배 선수들은 거의 다 불가리아를 떠나 미국 등지로 망명하였다고 했다.
그녀에게도 미국 대표팀의 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의가 여러 번 들어왔었단다. 그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뒤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자유에 많은 제약을 받고 가난하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한 친구가 있는 조국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망명의 길이 아니더라도 대망의 꿈을 안고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이민의 길을 택한들 누가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어느 곳에 정착하든 자신의 몫이다. 어디에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에 살든지 가족 구성원이 어떤 국가관과 철학을 가졌느냐에 따라 자신의 조국을 빛내는 애국자가 된다. 반대로는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삶이 되기도 한다.
유대 민족은 조국 땅을 잃어버리고 수천 년 동안 유랑하였지만 ‘우리는 선택받은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조건 없이 환대와 친절을 베풀었던 나는 ‘이그나토바’와 아주 특별한 이별을 하였다.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날 우리 미용실에 들렀을 때 나는 그동안 쌓은 우정의 표현이라며 준비한 기념품을 선물했다. ‘이그나토바’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행복해하였다.
‘이그나토바’를 나에게 소개해 주신 이화여대의 체조 부문 담당 김숙자 교수님은 그녀에게 큰 여행 가방을 선물했다. ‘이그나토바’는 그 자리에서 건네받은 새 가방에 자신의 헌 가방 속 물건들을 바로 옮겨 넣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천 원에 몇 개씩 하는 싼 비누와 스타킹, 타월을 쇼핑했던 모양이다. 새 가방에 담으며 시장에서 싸 준 허술한 포장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접어 넣는 것이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질 포장지까지 소중히 다루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겸허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 앞에서 아쉬움으로 서로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그나토바’는 문밖을 나간 한참 후 다시 허둥지둥 되돌아왔다.
조금 전 한쪽으로 밀쳐 두었던 헌 가방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버리려던 참이었다. 헌 가방을 다시 챙겨서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가방을 버리지 않고 챙기는 모습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버려도 좋을 것과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남이 가려 줄 수는 없다. 헌 가방이지만 거기에는 그녀만의 아름다운 사연과 추억이 들어 있을 것이 아닌가.
헌 가방을 버리지 않는 저 마음으로 그녀는 가난을 딛고 리듬체조 4관왕으로 세계적인 선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자신의 조국이 공산국가임에도 나라를 원망하고 떠나지 않고 불가리아가 대한민국처럼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가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그녀의 눈빛은 머지않아 불가리아도 그렇게 될 것을 믿는 신념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이그나토바’는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 성실하게 우리 선수들을 훈련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리듬체조 선수들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했다. 화려한 새 가방이 생겼지만 그것에 빠져서 옛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마음이 내 안의 감정을 흔들었다. 그것은 미국의 유혹을 물리친 그녀의 지조처럼 생각되었다.
그 후 국제 올림픽 경기가 있을 때마다 그녀를 추억하며 화면을 통해 리듬체조 경기를 관전한다. ‘이그나토바’의 환상적인 경기를 다시 보며 그녀와 함께했던 옛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더 이상 올림픽 왕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지도자로서 세계인들의 가슴에 감동을 선물하고 있을 것이다. 불가리아의 리듬체조 여왕으로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나는 늘 응원한다.
사랑하는 이그나토바, 늘 가능성을 피워 올리는 스승으로 영원하여라.
<꽃이 되리>
꽃이 사라지면
그 자리 무엇으로 필까
따스한 햇발에 버무리면
미소 띤 꽃망울 피어나리
너와 나 꽃밭으로 가자
꽃잎이 되고 향기가 되자
신의 눈에 젖은 미소
고을마다 향기로 퍼져
가문의 꽃이 되자
나라의 꽃이 되자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A)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