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는 수치심, 슬픔,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약함’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해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남성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어렵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감정이 거의 다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 어휘가 빈곤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둔감하다. 이런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S는 화를 참지 못하고 때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변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할 때도 있다. 자신에 대한 사소한 농담도 참지 못해 주먹이 나간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과제 수행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만 해도 화를 내고 심지어 욕까지 한다.
S의 부모는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아이가 슬퍼하거나 두려워 울면 마음을 읽어주기보다 야단을 치며 “남자가 약해 빠져서… 그 정도도 못 참아” 하며 야단을 쳤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며 스스로 참도록 강요했다. 실제로 진료실에서 S의 부모 역시 아들에 대해 속상한 마음, 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며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부모님 또한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감정이 다뤄지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명명하는 것조차 학습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 2세를 양육하며 비슷한 환경을 다시 제공하게 된다. 정서적 경험에 대해 양육자로부터 어떤 반응이나 공감도 얻지 못한다면 자신의 경험 전체에서 특정 감정을 변별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S와 같이 수치심이나 불안 등의 감정을 왜곡해 변별하기도 한다. 수치심이나 불안은 ‘약하고 나쁜 것이라고 인식해 ‘분노’로 표출한다. 양육자가 슬픔, 수치감을 절대 인정하지 않거나 이런 감정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피드백해주지 않으면, 아동은 슬픔, 안타까움, 억울함, 부끄러움 등의 감정을 변별하는 법을 학습하지 못해 정서적 대화를 배우지 못한다.
이런 아이들은 사회생활 중에서도 특정 감정을 변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슬픔이나 두려움, 수치심 같은 취약한 감정보다 화를 내는 것처럼, 쉽게 허용되는 감정으로 표현해 버려 갈등을 겪기도 한다. 정서적 대화가 결핍된 사람들은 ‘감정 표현 불능증’으로 보이거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니 무감각해 보이고 감정 교류를 통한 친밀감 형성을 할 수가 없다. 때로는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환경에서 용인되는 신체적 불편함(소화가 안 된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두근거린다)으로 호소한다.
유아기 발달 중에 감정 변별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먼저 ‘지금 순간’에 느끼는 감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통해 아동기, 청소년기에도 훈련할 수 있다. 우선 지금 느끼는 내적 감각(피부 아래의 감각)에 대한 경험 알아차리기를 연습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순간순간 변하는 감각과 그때 동반되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언어로 명명하는 연습을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자체에 익숙하지 않다면 다양한 감정별로 카드를 만들어 그중 어떤 감정에 가까운지를 선택해 연습해 보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을 표현해도 수용해 주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공감해 주는 분위기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