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

입력 2022-10-09 19:32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돈이 있으면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으면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1988년 한 인질범이 외친 이후 현재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말이다.

지강헌은 상습적으로 강도와 절도를 저질러 온 범죄자였다. 그는 1988년 10월 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송 중 미결수 11명과 함께 집단 탈주했다. 10월 16일 지강헌 등 탈주범 4명은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서 6명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했다.

인질극을 벌이는 와중에 지강헌은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라고 절규했다. 권력이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박탈감과 불평등에 분노한 것이다. 결국, 지강헌은 자살을 시도한 직후 진입한 경찰특공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19년 7월 라임 사태가 터졌다. 라임자산운용이 코스닥 기업들의 전환사채 등을 편법으로 거래하면서 부정하게 수익률을 관리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라임자산운용이 운용하던 펀드에 들어있던 주식 가격이 폭락하면서 그해 10월부터 환매가 중단됐다. 환매중단은 곧 파산을 의미한다. 이 사건으로 역대 펀드 사태 중 최대 규모인 피해자 4473명, 피해액 1조5380억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2020년 4월 라임자산운용의 돈줄이었던 김모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자, 그해 10월 ‘옥중 입장문’을 통해 고급 룸살롱에서 검사들에게 술 접대를 했다고 폭로했다. 김모 전 회장은 검사 출신 이모 변호사로부터 ‘혹시 추후 라임 수사팀을 만들 경우 합류할 검사들’이라며 나모, 우모, 임모 검사를 소개받으면서 총액 536만원 상당의 술 접대를 했는데, 그 중 한 명인 나모 검사가 실제로 수사팀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나모 검사, 이모 변호사, 김 전 회장만 뇌물죄가 아닌 ‘김영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우모, 임모 검사가 기소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힌다. 우모, 임모 검사는 밴드·접객원이 오기 전에 술자리를 떠났으므로 밴드·접객원 비용 55만원은 빼고 계산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김모 전 회장이 결제한 총 536만원에서 밴드·접객원 비용 55만원을 뺀 ‘순수 술값’ 481만원을 동석자 5명으로 나누면 접대비가 96만2000원이 되므로 김영란법 위반 기준인 1인당 100만원을 넘지 않으므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술값을 쪼개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접대한 김모 전 회장을 접대받은 사람에 포함해 나누는 방식도 희한하기만 할 따름이다.

이 사건 1심을 맡은 서울남부지법은 한술 더 떴다. 나모 검사, 이모 변호사, 김 전 회장도 모두 무죄라는 것이다. 김모 전 청와대 행정관이 밤 10시30쯤 다른 방에 있다가 옮겨가 함께 접대를 받았고, 이모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도 밤 10시50분쯤 인사만 하고 나갔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 다시 동석해 25분에서 30분 동안 함께 있었으므로 이들의 몫도 빼줘야 된단다. 이렇게 되면 1인당 받은 접대비가 약 93만9167원이 되므로 김영란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계산법이고 앞으로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판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저승에서 지강헌이 이렇게 비웃을 것 같다. “거봐. 내가 뭐랬어.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라고 했잖아. 돈과 권력만 있어봐. 판검사도 좌지우지 할 수 있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야. 우리 법이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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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