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지칠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내게는 가장 큰 위로다. 가까운 사람에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데 대중에게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작품밖에 없다. 관객들 곁에서 꾸준히 연기를 보여드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
한지민이 부산 해운대구 KNN시어터에서 8일 열린 ‘액터스 하우스’에서 배우로서의 소망을 밝혔다. ‘액터스 하우스’는 지난해 신설된 부산국제영화제(BIFF) 특별 프로그램으로 배우가 자신의 연기 인생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관객들과 소통하는 자리다.
한지민은 “연기한 지 19년이 됐는데 한 번도 국내에선 팬미팅을 해본 적이 없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런 행사나 포토월처럼 모두가 내게 집중하는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었다”면서 “오랜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 가다보니 이젠 기회가 되면 편안한 자리에서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올해 한지민은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시청자를 만났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쌍둥이 언니 영희(정은혜)를 가진 영옥을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지민은 “친척 중에 발달장애를 가진 조카, 다운증후군을 앓는 조카가 있어 멀리서는 지켜봤지만 함께 사는 가족만큼 그들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었다. 영옥을 연기할 때는 실제 다운증후군 앓고 있는 정은혜씨의 어머니를 많이 생각했다”면서 “은혜씨 어머니께서 처음 딸을 마주했을 때부터의 일대기를 포토카드로 보여주며 설명해주셨을 때 마음이 아팠다. 그 마음을 담아 연기했다”고 돌이켰다.
배우하기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한 관객의 질문에 한지민은 “얼마 전 은혜씨 전시회에 갔는데 발달장애 특수교사들이 내게 와서 ‘감사하다. 사회가 발달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 바뀔 줄 몰랐다’고 했다. 은혜씨 어머니는 ‘예전엔 은혜 얼굴을 보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는데 지금은 귀엽다고 함께 사진 찍어달라고 한다’고 하셨다“며 “작품의 힘이 크다는 걸 느꼈고 보람찼다”고 말했다.
신인시절 주연 배우로서 느꼈던 부담감에 대해서도 한지민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그는 “어릴 때 꿈이 배우는 아니었다. 길거리 캐스팅이 유행하던 시절이어서 중고등학생들이 잡지 모델로 데뷔하는 일이 많았고, 나도 그렇게 시작해서 ‘올인’이란 드라마에 송혜교 선배님 아역으로 처음 출연했다”며 “감독님들이 신인들을 엄하게 꾸짖던 시대였고, 현장에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연기를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매일 집에 가서 울었다”고 말했다.
그 때 한지민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은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청연’이었다. 한지민은 “‘대장금’에서 이영애 선생님 친구 역할이 들어왔는데 주인공이 아니어서 정말 좋았다. 현장에 가서 선배님들이 연기하는 걸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서 “목소리가 이렇게 다른데 이영애 선배님 말투도 따라해보고 카메라 찾는 법같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세상을 떠난 배우 김주혁, 장진영과 함께 한 ‘청연’을 찍으면서 한지민은 처음으로 배우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지민은 “당시 윤종찬 감독님께서 감정선을 끌어내주시고 내 연기에 욕심을 내주셨다. 뭔가 해냈다는 쾌감이 들면서 이 일을 계속 한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늘어나지 않을까, 잘 해내고 싶다,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감독님께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슬럼프도 찾아왔다. 로맨틱코미디물을 계속 찍을 때였다. 그는 “어느날 촬영을 하는데 익숙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로맨틱코미디는 이야기 흐름이 아주 비슷하다”면서 “‘내가 왜 비슷한 연기를 계속 하고 있지’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예전엔 지금과 달리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맡는 캐릭터도 다양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장수상회’ ‘그것만이 내 세상’ 등 여러 영화를 찍으며 다양성을 찾았다”고 말했다.
영화 ‘미쓰백’은 배우 한지민을 재발견하게 해준 영화다.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거친 모습들이 담겼고, 호평 받았다.
한지민은 “기존과 다른 캐릭터를 맡고 싶단 욕심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시도가 버겁고 두려웠다. ‘미쓰백’ 시나리오를 읽고는 세상에 필요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치 누가 내게 불을 붙인 것처럼 두려움 없이 무턱대고 시작했다”며 “촬영이 끝나고 개봉을 기다리다가 막상 개봉한다고 하니 무서웠다. 욕 먹을 일밖에 없겠다고,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걱정과 달리 평가가 좋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꿈같은 일들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쓰백’ 이후에 성격도 조금은 바뀐 것 같다. 그 전에는 속으로만 ‘도전해야지’ 했는데 그 작품을 찍고 나선 큰 산을 마주하더라도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넘을 수 있을 게 됐다”고 덧붙였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면서 한지민이 배운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청연’ 덕분에 연기를 이어가게 됐고 늘 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덕분에 오랜 팬들이 생기고 시청자들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며 “처음엔 막연히 ‘나만 잘해내야지’하며 욕심을 채우고 싶었다면, 드라마를 하면서 배우가 누군가에게 감정을 선물해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스스로에게 조금씩 너그러워지는 법을 연습했다. 한지민은 “어릴 땐 내 연기가 성장하는 것을 빨리 느끼고 싶었는데 작품을 거듭해도 좌절하는 순간이 훨씬 많았다. 지금도 어렵고 힘들다”며 “저 자신에게 굉장히 가혹한 편이었는데 30대를 지나면서는 ‘남에게 그렇게 관대하면서 왜 스스로는 질책만 할까’ 생각하며 자신을 토닥여주기도 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말했다.
배우가 아닌 인간 한지민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는 “작품하면서 몇 개월간 집중적으로 그 역할로서 살다가 작품이 끝나면 공허한 마음이 크다. 어느 순간 ‘인간 한지민으로서의 삶을 굉장히 많이 쌓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간 한지민의 일상을 살도록 노력하게 됐다. 길에서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실 때 불편한 순간이 있긴 하겠지만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대중의 시선이 두려워 한지민의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부산=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