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미 정상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 뒤 에필로그 영상에서는 남북 정상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등장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한국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한다. 통일은 이제 시작이고, 어려운 일이고, 국민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통일 하실 겁니까?”
영화 ‘강철비2: 정상회담’(2020)의 마지막 장면이다. 관객들로부터 ‘그럼, 해야지’라는 대답을 끌어내려는 의도였을 텐데, 실제 남북관계에서 희망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런 반응은 얻기 힘들 것 같다. 이 영화도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시기에 개봉한 탓에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
분단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는 실제 남북관계의 개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제작된다. 분단과 대치라는 설정 자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에도 ‘공조2: 인터내셔날’과 ‘육사오’가 개봉해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물론 둘 다 소재만 분단 현실에서 가져왔을 뿐,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묵직한 영화는 아니다.
‘공조2’에서 굳이 시사적인 부분을 찾아보자면 미국 쪽에선 “남과 북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같은 족속”이라고 하고, 북한 쪽은 “남조선과 미국이 삐걱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둘은 한통속”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서로 간의 불신을 간명하게 드러낸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 말기에 제작돼 윤석열정부 초기에 개봉한 ‘공조2’에선 최고위 빌런이 ‘백두혈통’으로 지칭되는데, 백두혈통을 대놓고 악당으로 부르는 건 정권이 바뀐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근년에 나온 분단 소재 영화의 대부분은 남북한 출신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다 협력하는 내용이다. 남과 북의 개인끼리는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느냐, 형제애가 생길 수 있지 않겠느냐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둘 사이의 방해물로 미국이 자주 등장하고, 가끔 일본과 중국도 가세한다.
지난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인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때 남북 외교관들이 함께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실화를 각색한 작품인데, 이국땅의 난리통에서 남북 양측이 경계하고 갈등하다 결국 협력하는 이야기다.
‘강철비’(2017)와 ‘PMC: 더 벙커’(2018)는 둘 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을 다룬다. ‘강철비’는 청와대 직원과 북한 공작원이, ‘PMC’는 글로벌 PMC(민간군사기업)의 한국계 용병과 북한 의사가 주인공이다. 두 주인공들이 절체절명의 한반도 위기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간다. 특히 ‘PMC’에선 미국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야비한 나라로 그려진다. 산만한 이야기 속에 마지막 대사가 뜬금없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한국계 용병 주인공(하정우)이 북한 의사(이선균)에게 “고맙다, 북한”이라고 하는데, ‘북한’이 극 중 의사에 대한 호칭이긴 했지만 말 그대로 북한이란 존재가 고맙다는 말로도 들린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지난달 22일 발표한 ‘2022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핵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응답은 전체의 92.5%에 달했다. 이처럼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탓에 남한의 핵무장에 대한 찬성 의견이 급증해 조사 이래 가장 높은 55.5%를 기록했다.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46.0%였는데, 특히 20대에선 27.8%에 그쳤다. 연구원 측은 “20대와 30대를 중심으로 통일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이것이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현재의 분단 체제를 선호하는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하루가 멀다 하고 탄도미사일을 쏴대고 미국 핵항모가 동해에 들락날락하는 현 상황에선 “고맙다, 북한”을 외치는 영화가 당분간은 나올 것 같지 않다. 북한을 바라보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