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영화에서는 무의식(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제 현실이 되어 악을 물리치거나 암시(暗示)적인 복선(伏線)의 이미지, 기억, 사건과 장면들이 특정 시공간으로 반복 재생되어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는 타임 루프(Time Loop) 기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극작 기법으로 과거-현재를 연결하거나 특정 시간과 장면을 연속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미래의 사건들이 꿈으로 재생되어 현실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에 감추어진 선악의 비밀들이 현실처럼 전개되어 파멸로 몰리기도 한다. 타임 루프는 극적 서스펜스 효과를 내는 극적 기법이기도 하다. 인간이 무의식 세계로 경험할 수 있는 예지몽(豫知夢)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 현실에서도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처럼 느껴지는 신비한 경험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초월적인 인간처럼 말이다. 극적인 긴장감을 자극하는 연극이 있다면 흥미로울 것 같은데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극단 산수유의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작, 김나영)가 타임 루프 기법을 극적 장치로 활용해서 한 가정의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무대로 배치해 내고 있다.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2020) 대본 공모 당선작으로 류주연 연출이 90분 동안 관객의 몰입감을 높여내고 엄마(미옥)으로 분한 이선주의 연기는 아들을 향한 절박한 내면의 절규와 이 시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으로 공감하게 만든다.
‘위버 멘쉬’와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효과
고등학생 진우 엄마 미옥은 꿈(무의식)의 경험들이 악몽의 시리즈물처럼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다. 그 꿈속의 이미지와 장면의 사건들은 현실이 되기도 하고 악몽은 꿈과 현실로 배회한다. 반복되는 꿈과 현실 사이에 관객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의 판단을 흐리게 된다. “어, 어디서부터 극중 인물의 꿈이고 현실이지? 아, 지금 장면이 현실이구나”라고 할 때 쯤 그다음 장면이 또다시 꿈이었다면. 마지막 결말은 현실인 것 같은데 마치 꿈처럼 인식되고 관객한테 들키지 않는다면. 90분을 극적인 긴장감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연극이 있다면 꽤 흥미로울 것 같은데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가 그렇다. 공연 제목에서도 눈치를 챘듯이 성장한 아들의 내면을 모르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아들을 알아가는 엄마의 이야기가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별한 연극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아이 일 것만 같았던 아들의 비밀과 이야기들이 영화 장면의 시퀸스 처럼 꿈으로 연속해서 투사되어 경험하고 실제 현실에서 아들을 알아갈 수 있다면 좋을 수도 있겠다. 미안하게도 꿈이 재생되는 악몽에서 아들이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고 초등학생 여아 두 명과 학부모, 초등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사건에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이 섞어지고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처럼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이었다면 극적 설정은 매우 흥미로워지는 플롯으로 바꾸게 된다. 보너스로 연출이 심리 게임을 하듯이 장면을 배치하면 연극의 몰입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극 <엄마는 아들을 모른다>의 비밀은 현실이 아닌 미옥의 꿈으로 시작되고 꿈은 현실처럼, 현실은 꿈의 이야기처럼 전개된다. 관객은 극이 끝날 때까지 비교적 눈치를 못 챈다. 미옥은 아들의 사건으로부터 아들의 섬뜩한 욕망을 현실의 밖 무의식으로 알아가게 된다. 사건과정을 통해 아들은 확증편향증적 인간, 진실과 모순의 오류, 관계와 소통의 부재 등을 들어낸다. 극중 인물 아들 진우(황비홍 분)는 엄마의 시선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고등학생이다. 엄마가 알지 못하는 비밀들이 드러난다. 진우는 형이 읽었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소설을 탐독하고 주인공 흘든 콜필드 처럼 가족과 학교 환경에서 분열된 내면성을 보인다. 정신적인 존재였던 형(유현우)은 어린 시절부터 성 정체성에 대한 혼돈과 존재로의 삶을 가족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다. 학교, 집단, 가족, 동료 커뮤니티로부터 정체성의 결핍과 존재의 모순으로부터 자아는 격리되고 가족과 타인을 통해 보호 받을 수 없었던 형의 존재는 마치 소설의 홀든처럼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극단적인 환멸과 증오, 파괴로 나타나고 인간과 사회는 파멸로 재창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1951년도에 발표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존 F 케네디 암살자인 리 하비 오스왈드 등 미국의 특정 사건을 일으킨 암살자의 바이블로 읽혀졌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범죄자 자신을 동일시한 현상이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버 멘쉬(Übermensch) 의 개념은 균열의 자아, 타자와의 불협화 된 소통, 모순과 부조리, 고통과 욕망 등으로부터 인간을 극복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영원불멸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으므로 초극(超人)을 통해 초인(超人)적인 존재가 되어 삶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형의 영향을 받았던 진우는 연민과 죄책감으로 확증편향적인 지식으로 섭취되고 정신적인 불안과 분열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과 사회는 파괴되고 재창조되었을 때 구원되고 영원불멸의 신적인 초월자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는 경향을 보인다. 진우는 홀든 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자신과 형, 사회와 인간을 지켜내고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영원히 회귀(回歸)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죽음으로 파괴했을 때 사회와 인간의 고통, 모순의 부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세상은 재창조된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믿음의 오류를 보인다.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는 이러한 사유의 오류들이 극단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의 확증 편향적 정신적 분열성을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 연결하고 아들 진우의 성장 내면에서 거칠게 자라고 있었던 존재의 부정, 고독과 소외, 존재의 결핍을 바라보며 아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마치 현실에서 알 수 없었던 아들의 성장통과 내면들을 타임 루프 기법을 통해 꿈으로 대화를 나누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처럼.
엄마의 절규, 아들의 욕망 사이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
무대는 단란해 보이는 평범한 가정집을 비추고 있다. 응접실처럼 보이는 탁자와 무대 전면 좌우측으로는 진우 방과 엄마의 방이 전면으로 분리되고 있다. 그 뒤와 주변은 세탁실로 설정되는 공간에서 극중 인물이 이동하는 것이 벽면 뒤로 보이는 구조다. 진우가 즐겨 입고 다니는 검은색 셔츠와 전면 구조는 하얀색으로, 좌우 공간 벽면은 검정 스크린으로 처리해 마치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면서도 현실과 꿈이 교차하고 공존하는 삶과 죽음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면서도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재현한다. 연극에서 사건을 암시하거나 진우와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타임루트 기법으로 파편적으로 진행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면서도 현실은 엄마의 꿈처럼, 꿈의 이미지는 현실로 배치된다.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까지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류주연 연출은 장면을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무대와 장면을 감각적으로 배치하고 꿈의 시간을 현실로 인식되게 하는 설정을 한다. 마지막 장면의 조각들을 그대로 이어가거나 죽음으로 파멸의 사건으로 몰고 간 자동차 키의 설정을 활용해 꿈의 시간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식이다. 꿈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는다. 불편한 경험들로 현실에서 의자에 앉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장면은 꿈의 경험으로 현실에서는 서 있는 것으로 비추어지는데 그 현실도 꿈의 연속적인 시간들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죽음의 파멸로 초극을 통한 초인적인 존재가 되어가 했던 아들의 비밀스러운 내면을 알게 된다. 극 중 장면 1장( 위버멘쉬)은 엄마의 꿈으로 파트 1.2로 나뉘는데 확증 편향적인 지식의 오류를 보이고 있는 파트1 장면은 교통사고를 위장한 사고와 경찰의 등장, 진우와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다루게 된다. 파트 2에서는 가해자로 전환된 아들의 사건에도 여전히 아들을 모르는 엄마의 모습들과 진우만을 보호하려는 시선들을 따라 진우의 위버멘쉬의 숭배, 유서의 발견, 홀든과 진우의 대화로 이어지며 엄마 승용차로 사고를 낸 사건은 확증 편향적 오류에 빠진 고등학생의 계획 범죄로 전환된다. 한때 <호밀밭의 파수꾼>은 암살자의 필독서로 읽혀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장면까지 타임 루프의 반복적인 시간 흐름까지도 “(중략) 매일 밤 꿈을 꿨어요. 가끔 어디부터 꿈이고, 어디부터 현실인지 헷갈려서... 어느 순간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알고 안심해요. 엄가가 죽는 꿈을 꿨는데 그게 꿈이라서 다행이었고, 동생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꿈이라서 다행이었어요” 꿈속에서 엄마 미옥의 대사는 현실로 깨어난 것처럼 파트1 진우의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이어지는 장면은 현실로 돌아온 미옥으로 인식하게 되면서도 여전히 엄마의 꿈은 현실로 여행 중이다. 작가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뭉개는 설정의 장치를 하는데, 미옥의 자동차 키다. 1장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 학습을 간다며 집을 나간 진우는 30분도 채 못돼서 아파트 언덕 내리막길을 달려 어린아이 2명과 학부모를 향해 돌진하는 사고를 내고 미옥의 꿈을 통해 재생된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고 위버멘쉬라고 적힌 유서와 <호밀밭의 파수꾼> 책이 발견되고 사건은 니체 사상의 지식 오류로 심취된 고등학생의 고의적 범죄로 전환되고 미옥은 꿈속의 악몽을 막기 위해 선반 위 자동차 열쇠를 숨긴다.
이어지는 장면은 다시 자동차 사고 장면으로 반복되는데 숨겨 놓은 자동차 열쇠로 진우가 사고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단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자동차 보조키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악몽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경찰관과 대화를 통해 몰았던 아들을 알아가게 된다. “아침에 진우 나가는 것도 못 봤어요. 그 애 얼굴을 봤다면 뭔가 이상 하다는 낌새를 느꼈을 까요? 사랑한다고 안아줬으면 이 끔찍한 악몽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최경감(이지혜 분)과 대화가 절규하듯 이어진다. 2장으로 연결되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과 진우의 대화, 샐린저 현상을 보이는 진우 내면을 담아낼 때까지도 미옥의 꿈은 현실로 돌아온 듯 보이면서도 여전히 꿈과 현실을 배회한다. ‘호밀밭의 초대’에서 미옥은 아들이 홀든 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자신과 형, 사회와 인간을 지켜내고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영원히 회귀(回歸)할 수 있다는 망각의 오류들을 대화해 설득하고 아들을 몰랐던 시간만큼 자식을 이해하려는 통증의 시간을 거친다. 미옥은 비로소 “너한테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아. (중략) 홀든이 하지 못한 걸 해내는 날”이라고 말하고 진우의 내면은 “(중략) 보고 싶은 대로만 날 보잖아. 우리 둘이 꿈꿔왔던 위버멘쉬가 뭔지 모르잖아” 진우는 엄마를 향해 마음이 닫히고 격렬한 무대로 전환된다.
순간 엄마의 목을 조르고 보조키를 들고 나가려는 진우를 향해 저항할 수 없는 미옥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절망하는데 연출은 이 장면까지도 꿈의 시간을 현실처럼 연결하고 배치하는 장면 전환과 긴장감으로 연극의 몰입도는 정점을 향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도 1장과 동일한 시간으로 반복된다. 꿈에서 경험한 악몽의 시간과 진우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위버멘쉬가 되어 흘든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꿔왔던 아들의 내면을 알게 된 미옥은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의 과정을 거친다. “위버멘쉬가 되면 우리 아들 진우는 사라지고 없으니까.(중략) 무언가를 파괴해야 초극이 되는 거면 엄마랑 해. 엄마는 니가 어디까지 자랐는지 몰랐어. 생각이 높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몰랐네. 인제 와서 널 따라 잡을 수가 없어. 엄만 니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고 넌 엄마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우린 한 집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온 거지.(중략) 널 엄마 세상으로 데려올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엄마가 가려고.” 고백에 진우는 어린 시절 엄마의 화장품을 바르고 누나라고 부르던 형의 기억을 꺼내 놓고 미옥과 진우는 악몽의 열쇠 스페어 키를 들고 형과 큰아들을 만나러 간다. 화사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미옥의 설정으로 현실로 돌아온 진우와 미옥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마지막 장면 또한 여전히 알지 못했던 진우와 대화를 시도하고 시간 여행하는 미옥의 꿈으로 느껴진다.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타임 루프 기법과 극적인 장치로 숨겨 놓으면서도 연극적인 환상을 깨지 않고 극적인 반전과 긴장감을 섬세함으로 장면을 이어 붙이는 연출과 미옥으로 분한 이선주의 연기는 아들을 향한 절박한 절규로 이 시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으로 읽히게 만들어낸다. 이웃 아파트 여자로 분한 이현경의 등장으로 웃음으로 템포감을 높이면서도 배우들의 앙상블은 흐트러짐이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때로 일상의 재현은 연극적인 균형감을 깨기도 하는데 특정 장면에서 미세한 균열을 보인다. 여전히 아들을 모르는 이 시대의 엄마들이 꼭 봐야 할 연극으로 추천하는 작품이다. 많은 연출 작품들이 있지만 <12인의 성난 사람들>로 류주연 연출의 대중적인 감각을 알리고 변하지 않는 지번 <경남 창녕군 길곡면>으로 한국 사회 비정규직과 출산 문제의 경고음을 울려왔다. <공포가 시작된다>로 극단 산수유의 건재함을 들어내고 이번 작품은 류주연 표의 성숙한 연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희곡은 류주연을 만나 무대로 살아나는 텍스트가 됐고, 연출을 닮은 언어를 희곡으로 찾아낼 줄 아는 배우의 감각이 있는 연출가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