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문호인 월리엄 세익스피어와 쌍벽을 이루는 존 밀턴은 그의 ‘고뇌하는 삼손’이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대사를 읊조린다. “오! 삼손은 이스라엘 그리스도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자 변덕스런 나의 영적상태를 보여주는 투명한 거울이다.” 사실, 그렇다! 성경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는 증언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기 위해 고전분투하던 시대의 기록이다. 또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 일종의 과도기적 무정부상태에서 그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삿 21:25) 처신했던 어둡고 침울한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행적과 위업이 많이 소개된 사사를 대사사라고 일컫는데 대개 이민족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전쟁영웅들을 가리킨다. 옷니엘과 드보라 및 기드온과 입다, 에훗과 삼손이 바로 그들이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장(총 4장)을 할애해 기사(奇事)를 담은 사사가 나실인 삼손이라 할 수 있다.
약 40년간 숙적 블레셋인의 손에 넘겨진 소라 땅에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자녀를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삿 13:5)고 통보한다. 그 후 천사는 마노아 부부에게 다시 찾아와 예언하기를 그 아이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될 것이며 그는 오랫동안 블레셋의 압제아래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원할 자라고 재확인시킨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특별한 능력을 허락하셨다. 그는 맨손으로 사자를 새끼 염소 찢듯 찢어버리는 힘센 장사였다. 심지어 나귀턱뼈로 수천의 블레셋 병사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놀라운 힘과 능력을 잘못된 곳에 사용했다.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려 충동적으로 혈기를 부리기도 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주어진 자기 본분을 망각하기도 했다.
삼손의 일생은 크게 세 가지 사건에 의해 불행하게 되는데 모두 블레셋 여인과 관계된 것이다. 처음엔 딤나에 내려가 블레셋 여자와 결혼한 일(당시 그들과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 않았다.) 다음은 가사의 기생에게 들어간 일과 마지막으로 소렉 골짜기에 사는 요부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머리털이 밀리고 두 눈이 뽑힌 채 옥중노예가 된 일이다. 본문은 ‘밤의 여인’ 들릴라와의 치정관계에서 비롯된 삼손의 극적최후와 함께 수천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게 되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호시탐탐 삼손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적(公敵)인 삼손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큰 힘이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그를 결박해 굴복하게 할 수 있을지 알아내고자 애썼다. 결국 간교한 블레셋 방백들이 은 천백 세겔(약 165억원)로 창기 들릴라를 매수하여 괴력의 삼손을 묶어 사로잡을 수 있는 은밀한 음모를 꾸몄다. 루벤스의 걸작 ‘삼손과 들릴라’(1610)는 이런 극적인 장면을 에로틱한 이미지를 실어 연출하였다. 무대는 고급 사창가이다. 작품 속 밝은 빛을 받는 등장인물이 모두 네 명이다. 부언하면 붉은 드레스를 입은 풍만한 몸매의 들릴라와 그녀의 무릎 위에 술 취해 잠들어 있는 근육질의 삼손과 그의 옆에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자르는 이발사 및 그 뒤에서 촛불을 들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뚜쟁이 노파가 그들이다. 게다가 어두운 화면 오른쪽의 열린 문엔 블레셋 병사들이 매복해 숨죽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근데 양초의 불빛이 가장 밝은 곳은 삼손의 머리와 가위로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발사의 손짓, 그리고 배신하는 들릴라의 얼굴표정이다. 돈을 받기 위해 사랑을 팔아먹는 팜 파탈이 일말의 죄책감은 느낄 수 있었을까? 루벤스는 양초 불빛의 밝고 어두운 명암을 통해 영웅의 몰락을 긴장감있게 표출하고 있다.
삼손은 이방인 딤나의 첫 여인에게 반해 세상을 사랑하였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삿 14:3) 즉 그는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한 정욕적 사람이었다. 세상은 빼앗는 영(靈)이다. 우리도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좋게 보지 않는가? 그렇게 보기 좋은 대로 행하다가 세상은 우리의 영적 눈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삼손은 설상가상 셋째 여성 들릴라에게 마음을 내어줌으로써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다. 그는 유독 그녀에게만 ‘사랑하매’(삿 16:4)라는 표현을 썼다. 사랑을 하면 상대방이 마음을 요구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에게서 힘의 비밀을 캐내려고 했지만 세 번이나 속은 그녀는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삿 16:15)고 불평하였다.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내어줄 때,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배반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삼손은 들릴라의 간사한 꾐에 빠져 그만 진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자기 능력의 근원이 삭도를 대지 않은 머리카락에 있음을 토로한다. -실은, 야훼의 영(靈)이 그와 함께 하였다.- 머리털 일곱가닥이 밀린 삼손은 그 힘이 없어졌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두 눈을 빼고 가사에 끌고 내려가 놋줄로 묶어 옥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게 했다. 그의 이름이 ‘태양의 사람’인데 짐승과 같은 노예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한편 성경기자는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고 기록한다. 아직 삼손의 비극 스토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야 대수로울 것 없지만 뭔가 새로운 시작을 가리키는 듯하다. 삼손은 오랫동안 자신을 이스라엘의 영웅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는 일평생 나실인으로서 정체성과 소명의식이 전혀 없었던 사사였다. 근데 그런 그가 두 눈이 뽑힘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영혼의 눈,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만 빛을 볼 수 있듯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뼈아픈 후회와 자책뿐이었건만... 그렇기에 자라나는 머리털은 소위 그의 자각이 성장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함께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은혜의 증거였다.
블레셋 방백들은 원수인 삼손을 그들이 섬기는 폭풍우의 신, 다곤이 잡아주었다고 믿었기에 그 신당에 모여 큰 축제를 벌였다. 그러곤 옥에서 삼손을 불러다가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재주(잔인한 고문의 일종)를 부리게 했다. 그는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그 집을 버틴 두 기둥을 찾아 의지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는 그들과 더불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다. 그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리길 원했다. 성경은 그 날에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들의 수가 그가 살았을 때 죽인 사람들의 수보다 더욱 많았다고 기록한다.(삿 16:30) 곧 그가 진정으로 통회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다시금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서 사용하셨음을 일컫는다. 요컨대 히브리서 기자는 삼손의 최후를 “믿음으로 의를 행하였다”(히 11:32~ 33)고 평가한다.
이정미 객원기자 hesedia6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