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완전한 형태의 헌법을 완비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장로교 제헌절’ 100주년인 셈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22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11회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헌법’을 공포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과 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국내 여러 장로교단의 뿌리인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당시 헌법에 ‘신경’·‘성경요리문답’(교리), ‘조선예수교장로회정치’(정치), ‘권징조례’와 ‘예배모범’(권징과 예배 예식)을 담아 법체계를 세웠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됐지만, 당시 총회는 1907년 출범한 ‘독노회’(총회 설립 전 단계의 정치 조직)의 규칙만 가지고 있었다. 미완의 법체계 위에 총회를 세운 것이었다.
총회 창립 후 10년 동안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창립총회에서 중국 산둥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을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이어 1919년 8회 총회에서 ‘교회진흥 운동’을 결의하고 전국적인 전도 운동에 나섰다. 교세가 성장할수록 완전한 헌법에 대한 요구는 커졌다.
1915년 열린 4회 총회에서 사무엘 마펫·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와 양전백·김필수·김선두 목사 등 5명으로 구성된 교회정치편집위원회가 출범한 것이 헌법 제정을 위한 첫 출발이었다. 이후 수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쳐 1921년 10회 총회에서 헌법이 통과된 뒤 전국 17개 노회의 수의(收議)를 거쳐 이듬해 공포됐다. 노회 수의란 총회의 중요 결의를 전국 노회원들에게 물어보는 여론 수렴 과정으로 국민 투표와 비슷한 절차다.
서원모 장로회신학대 교회사 교수는 14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장로교는 헌법 중심주의를 따르는 만큼 완전한 형태의 헌법을 갖추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면서 “그런 면에서 1922년의 완비된 헌법 공포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체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표준으로 한국교회에 맞는 헌법을 만들어 교세 성장에도 자양분을 제공한 면이 크다”면서 “그사이 장로교가 분열했고 이미 한 세기가 지난 만큼 각 교단의 현실과 시대상을 반영한 세밀한 헌법 개정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제안했다.
11회 총회에서는 헌법 공포 외에도 다양한 결의가 있었다.
10회 총회장인 이기풍 목사의 개회설교로 시작한 총회에는 만국 주일학교연합회 회장 피어스 박사가 참석해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침 총회에서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창립했다.
또한 총회가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했던 최관휼 목사가 러시아 정교회로 이적했다 10년 만에 뉘우친 뒤 교단으로 복귀한 것도 이 때였다. 미국의 네티 메코믹 여사가 평양신학교 신축을 위한 헌금도 했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김성택(1875~1393) 목사의 간증도 흥미롭다.
신앙이 없던 그가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다 마펫 선교사를 만나 대화한 뒤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잠을 잘 때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음성을 들은 뒤 평양 장대현교회에 등록해 26세에 세례를 받고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