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가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복구 발걸음이 재다. 제주에서는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양배추 마늘 쪽파 등 밭작물이 침수와 해풍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추석을 코앞에 두고 태풍 때문에 미처 벌초를 끝내지 못한 집들은 복구도 잠시 미룬 채 부랴부랴 조상 묘로 향한다.
제주의 추석 명절 준비는 벌초에서 시작된다. 제주 사람들은 음력 8월 초하루에서 늦어도 추석 전날까지 벌초를 끝낸다. 육지에서 추석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거나,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과 순서가 뒤바뀐 셈이다. 이는 제주의 묘지가 대개 중산간(해발 200~600m)에 위치한 데다 가시덤불이 많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에선 벌초 당일 친족들이 합동으로 윗대 조상의 묘부터 ‘모둠벌초’를 한다. 모둠벌초가 모두 끝나면 직계 가족 묘소를 찾아 ‘가지벌초’를 한다. ‘식게 안 한 건 몰라도, 소분 안 한 건 놈이 안다’(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하지 않은 것은 남이 안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제주 사람들에게 벌초는 중요하다. 만일 다른 지방에 거주해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현금이라도 보내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음력 8월 1일을 임시 휴교일로 정해 학생들이 벌초에 참여하도록 했었다. 마소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돌로 울타리를 두른 조상 묘에 수십 명의 자손이 모여들어 벌초하고 음복하는 모습은 육지 사람들에겐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벌초에 들이는 정성과 달리 제주의 추석 차례상은 간소하다. 내륙과 달리 제주는 밭농사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을은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가 아니라 한창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농번기였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밭일을 해야 했고, 동시에 소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촐베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제주도의 추석용 제물 중 특별한 것은 송편이다. 지역마다 모양이 조금 달랐는데 제주시의 송편은 동그란 보름달 모양에 가운데를 손으로 움푹 눌러 살짝 들어가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반면 서귀포지역은 통통한 조개 모양이다.
제사상에 오르는 생선도 지역마다 달랐다. 서귀포 지역과 제주 서부에선 주로 옥돔을 올렸고, 제주 동부에선 우럭을 썼다. 하나의 섬 안에서도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가 달랐던 셈이다. 그래도 생선 중 제일은 옥돔이라 제숙을 말할 때 생선이라고 하면 옥돔을 나타낸다.
추석 명절의 나물로는 제철 채소인 양애나물이 대표적이다. 양애는 제주도 초가 처마 밑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주로 심었다가 추석을 전후해 양하의 뿌리에서 나온 꽃대를 따서 데친 뒤 무쳤다.
적의 제일은 돼지고기다. 추석은 추렴한 고기가 상하기 쉬웠던 계절인 탓에 돼지고기를 덩어리째 삶거나 간장에 졸여 집안 가장 시원한 곳에 걸어두었다가 명절 전날 직화로 구웠다. 적과 대나무 꼬지를 장만하는 일은 보통 남자들이 했다.
제주에서는 카스텔라나 롤케이크, 단팥빵 등을 진설한다. 예전에는 빵이 귀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조상께 드린다는 의미다. 지금도 명절이 다가오면 동네 빵집마다 카스텔라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 명절의 지내는 방식 가운데 육지부와 크게 다른 것으로는 문전제와 걸명이 있다.
걸명은 제사를 마친 후 집사자가 강신잔에 지방을 태워 넣고 제수를 조금씩 떼어 담은 뒤 지붕 위로 던지는 행위다. 제물을 던지는 것은 신위를 따라온 잡신들에게 대접한다는 의미인데, 주택 구조가 바뀐 현재도 이 같은 관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전제는 집안에 좌정한 신 중 으뜸 신인 문전신에게 지내는 제의다. 보통 제사나 차례를 지내기 전 마루에서 현관 쪽에 작은 문전상을 놓고 지낸다. 걸명처럼 문전제 역시 무속적 관념에서 유례했다.
높이 솟은 한라산과 푸른 바다는 육지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정작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와 한라산, 화산섬이라는 지질학적 특성은 벼농사가 어렵고 식수를 구해야 하는 고통을 안겼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척박하고 힘든 삶 속에서도 가족과 친지, 마을 사람들과 협동하고 화목을 다지며 명절 풍속을 이어왔다. 제주에선 명절을 ‘쇤다’라 아니라 ‘먹으러 간다’고 표현한다. 제주 사람들에게 함께 모여 먹는 행위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8일부터 시작된 이번 추석에는 오는 12일까지 닷새간 22만명이 제주를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